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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나이, 박노해 ㅡ
난자기
2021. 1. 12. 21:22
어느 가을 아침
아잔 소리 울릴 때
악세히르 마을로 들어가는
묘지 앞에
한 나그네가 서 있었다
묘비에는 3·5·8…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 돌림병이나
큰 재난이 있어
어린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구나 싶어
나그네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마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있고 사랑을 하고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여기 묘비명의 숫자가
참삶의 나이라오
ㅡ박노해, 삶의 나이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