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뿌리로 부터, 나희덕 ㅡ
난자기
2021. 8. 19. 11:24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ㅡ나희덕, 뿌리로부터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