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것 / 유흥준
난자기
2016. 2. 4. 23:59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긴 사람이다
어깨 축 처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미리 한번
중간 점검해보는 사람이다
정부과천청사는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가야 닿을 수 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공무원들.
아무도 없는 운동장
한가운데 서보는 사람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흙먼지를 오지게
한번 뒤집어써보는 사람이다
어디 피할 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다
마치 고문당하는 사람이고
마치 숙청당하는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이렇게 홀쭉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이다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스스로 고개를 꺾는 것이다
그림자 중에
가장 긴 그림자는
운동장에 드리운 사람이다
ㅡ유홍준, 운동장을
가로질러간다는 것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