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욕망이란 무엇인가

난자기 2015. 11. 29. 14:43

우리는 누구나 욕망에 관한 전문가일지도 모른다. 숨을 쉬고 있는 한, 매일 매 순간마다 욕망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밤에 자는 동안에도 꿈꾸면서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욕망을 어찌할 수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욕망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욕망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가 좋은 길라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욕망, 욕구라는 용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욕망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욕구는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도 욕망과 욕구는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대체로 혼용되어 왔다.

 하지만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욕망(Begierde)과 욕구(Bedürfnis)를 자기의식의 차원에서 처음으로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욕구는 타재()의 정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의 정념 또는 결핍의 정념에 불과하지만

욕망은 대상의 타재, 이 타재의 존립 일반을 지양하고 대상을 주체와 합일시키는 활동이다.1)

헤겔의 난해한 말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욕구는 자기 의식적 주체인 인간이 바라는 대상이 그에게 결핍되어 있을 때 느끼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욕구는 그와 이 대상이 분열되어 있을 때 그가 느끼는 정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욕망은 그가 바라는 대상의 결핍을 느끼고 이 대상이라는 다른 존재(타재)를 자기화해서 이 대상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활동의 정념이다.

그래서 욕망은 그와 이 대상의 분열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욕망과 욕구는 다 같이 결핍에 관련되는 개념이지만 욕망이 욕구보다 더 높은 개념일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지라르(René Girard, 1923~ ) 같은 사상가들은 헤겔처럼 욕망과 욕구를 확실히 구분하고 욕망을 욕구보다 더 높은 개념으로 간주하였다. 라캉은 욕망을 생리적 욕구로부터 구분하여 언어적 차원에서 파악하였다. 들뢰즈도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여 욕망을 리비도와 같은 순수한 에너지로 보았지만 욕구는 욕망으로부터 파생된, 사회적으로 조작된 결핍으로 간주하였다. 지라르도 욕망을 욕구로부터 구분하여 욕구를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차원에 두었지만 욕망은 인간적인 차원에 두었다.

이와 같이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여 욕망을 더 높게 평가하려는 사상가들이 있긴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나 철학에서도 대체로 엄밀하게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연재에서도 때때로 욕망과 욕구를 구분하긴 하겠지만 대체로 혼용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욕망을 가리키는 숱한 용어들이 동서양에서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우리가 용어의 혼란에 빠져서 욕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숱한 용어들을 욕망과 욕구로 뭉뚱그릴 것이다.

욕망 개념의 네 가지 해석

첫째, 욕망을 결핍으로 파악하는 흐름

이 흐름은 서양에서는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된다. 플라톤은 욕망이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하였다.2) 플라톤의 이러한 견해는 서양철학의 주요한 흐름을 이룬다. 경험론자인 로크, 합리론자인 데카르트도 이 견해를 따랐으며 헤겔도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했다.

 

서양 철학의 기틀을 만든 플라톤. 욕망을 결핍으로 파악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라캉과 사르트르도 이 견해를 이어받았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타자(Autre)의 욕망이다. 헤겔의 욕망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 정의에서 타자의 욕망이란 타자를 욕망함을 뜻하면서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함도 뜻한다. 어느 쪽이든 타자의 욕망은 결핍과 관련되어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이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대자)이면서 사물적 존재(즉자)이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결코 의식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사물적 존재일 수는 없다. 그는 의식적 존재일 뿐이므로 즉자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헛되게 욕망할 뿐이다.

동양에서는 결핍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명시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순자는 “보기 흉하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며 … 가난하면 부유해지기를 바라며, 천하면 귀해지기를 바라는데, 진실로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반드시 밖에서 구한다.”3)고 주장함으로써 욕망을 분명히 결핍으로 해석했다. 성리학에서도 좋은 음식, 대궐 같은 집, 아름다운 남녀 등이 욕망의 주요한 대상으로서 경계되기 때문에 이것들의 결핍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12연기에 나오는 욕망인 갈애는 갈증이 심한 사람이 우물가에서 느끼는 욕망에 비유되기 때문에 불교도 역시 욕망을 결핍으로서 파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범신론자였지만 동시대인들에게 무신론자로 오해 받은 스피노자. 이성이 욕망을 제어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훗날 니체에게 영향을 끼쳤다.

 

 

둘째, 욕망을 생산적 활동성으로 파악하는 흐름

이 흐름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로부터 연유한다. 스피노자는 욕망(conatus)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아 이성이 욕망을 제어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고 여겼다. 더구나 그는 욕망과 대상의 관계도 역전시켰다. 욕망을 결핍으로 파악하는 흐름에서는 결핍된 욕망 대상이 욕망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욕망 대상에 방점이 찍힌다.

그 반대로 욕망이 욕망 대상을 만들어낸다면 욕망에 방점이 찍힌다. 플라톤에 맞서서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어떤 대상이 좋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이 좋다고 일갈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도 스피노자의 입장을 이어받아 욕망이나 의지가 가치나 형식을 부여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니체의 권력에의 강한 의지 개념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에 상응하여,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고 능동적이다.

스피노자와 니체의 뒤를 잇는 들뢰즈는 욕망과 충족, 결핍과 획득의 이원론에 반대하여 욕망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성으로서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욕망의 주체화와 인격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욕망하는 주체라는 용어 대신에 욕망하는 기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서양 철학의 전통적 흐름을 거스른 이단아 니체. 욕망을 가치나 형식을 부여하는 힘으로 보았다.

 

 

셋째, 욕망을 모방적 경쟁에 근거하는 정념으로 파악하는 흐름

지라르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기와 질투 또는 부러움과 선망에 착안해서 욕망을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이란 욕망 주체와 욕망 대상 사이의 2자 관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욕망 주체와 이 주체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 그리고 욕망 대상의 삼각관계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내가 본받고 싶어 하는 남이 어떤 욕망 대상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그 대상을 갖고 싶어 그 대상을 가지려고 하지만 그도 그 대상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나와 그는 그 대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모방적으로 경쟁하게 되는데 이 경쟁이 격화될수록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은 더 커진다. 지라르는 이러한 욕망이 일상생활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넷째, 욕망을 금기를 위반하려는 정념으로 파악하는 흐름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도 역시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기에 착안해 욕망을 이해했다. 법, 도덕, 관습과 같은 금기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 질서를 보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금기를 어기도록 유혹하고 부추긴다.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 일을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조각상으로 유방과 엉덩이가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출처: (cc) MatthiasKabel at wikipedia>

 

 

즉, 금기는 신비의 불가침 영역을 만들어 우리가 그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도 그 영역에 들어오도록 우리에게 손짓한다. 바타유는 이런 욕망을 선사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루었으며 에로티즘을 통해 동굴벽화를 해석하고 인류의 원초적 욕망을 드러내었다.

욕망 개념의 이 네 가지 해석이 동서양의 모든 욕망 개념을 포괄하지도 않고 욕망의 전모를 드러낸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네 가지 해석이 우리가 욕망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욕망 개념의 이 네 가지 해석 중에서 첫 번째 해석은 대체로 금욕주의와 관련된다. 플라톤은 이성(logos)이 욕망을 제어하고 지배해야 하며,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을 여기서는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이러한 금욕주의가 서양 철학사를 2천여 년 동안 석권해왔다. 이러한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에 반대하는 서양의 철학자들은 니체, 바타유, 들뢰즈 등이다. 이들은 다 같이 이성보다는 광기나 욕망을 강조했으며 금욕주의가 노예의 길이라고 비판하였다.

 

 

통 속에서 거지처럼 살며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은 철학자 디오게네스.

 

 

동양에서 첫 번째 해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는 유교와 불교도 금욕주의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는 플라톤의 금욕주의와는 달리 이성 중심적이지 않다. 유교에서 이()로써 욕망을 절제한다는 사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때의 이는 서양의 이성과 다르다. 그것은 지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인간이 하늘로부터 성품을 받아 천지와 통하는 영적인 능력을 지향하는 포괄적 지성이다. 또한 불교에서도 지적 통찰이 요구되긴 하지만 참선과 같은 수행을 통하여 욕망을 누르고 없앤다.

조홍길 | 부산대 ·동서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