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관조냐 참여냐 / 박작당

난자기 2016. 4. 27. 17:00


저의 시에서는 자연을 찬양하거나 사랑한다고 하는 시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시에 쓰기를 자연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건 곧 시가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거죠. 그러나 이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시는 매우 지적으로 태만하고 나태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 최종천]


전적으로 동감하며...

다소 어려운 얘기라 나름 해석을 해보는데 동의 해줄지는 의문이다...

 

시라는 장르가 소화시킬 수 있는 테마들 중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자연에 대한 관조다
미사여구를 최고 수준으로 구사해도 별 거부감이 들지 않는 주제이며
현란한 글 솜씨가 덧붙여진다면 금상첨화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자연이라는 주제다
다소 떨어지는 문력을 가진 사람도 자연을 노래하는 경우라면 대강 넘어가주는 관용을 바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와 이 주제는 비교적 궁합이 잘 맞는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사회라는 주제로 넘어가면은 어떻게 되는가?
이 테마를 시로 표현해내기는 기술적으로 난해하다
이 주제에 시라는 장르가 먹혀 들기 위해서는 시가 가진 고유의 특성, 운율이라든가 함축이라든가 어떤 경우는 은유의 기법까지 손상시켜야 한다
소설인지 시인지 구분이 안가는 분량을 가진 시,
거칠다 못해 플롯을 무시해버리고 마는 시,
직격탄을 날릴 수 밖에 없는 경우라면 은유는 성가시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적 구상을 단념하여서는 안 된다
이 주제를 효과적으로 살려 낼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시에 대한 천착은 바로 민중 속에서 살아 숨쉬는 시를 쓰기 위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이 가져야 할 소명이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다 속 시끄럽고 어렵다 내사마 歸去來辭나 읊조리고 살란다”
이런 관점에 대해 최종천은 우리 시대의 시들은 상황인식이 매우 부족하고 자각되지 못한, 지적으로 태만하고 나태한 상태라고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하는 김수영의 시
‘풀’이다
시가 가진 고유속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도  예의 주제를 이 처럼 완성도 있게 그려낸 시는 사실 드물다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 하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 뿌리가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