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 서동욱
철학자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격투기선수일 수도 있고 아우렐리우스나 에픽테토스처럼 황제나 노예일 수도 있으며, 스피노자처럼 첨단 과학의 기술자일 수도 있고, 라이프니츠처럼 외교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동은 될 수 없는가? 양을 치며 유목하는 민족을 통해 한 종교가 탄생한 이후 목자의 이미지는 종종 사상을 지배해왔다.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자’라는 인상 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자의 이미지, 즉 지킴이의 이미지와는 다른 목동의 이미지는 없는가? 물론 있다. 그것이 노마드(nomade, 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가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쿠체(John Maxwell Coetzee)의 작품인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바로 유목민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인상 깊은 구절을 이 책에서 읽는다.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유목민인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까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유목민은 일정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살아간다. <출처 : NGD>
이 인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종주의에 대한 고발만을 부각시키려고 이 구절을 읽은 것은 아니다. 정주민들은 위계적 정체성을 꾸미고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정주를 가능케 하는 경계(또는 국경)가 이미 배타적 정체성의 표현인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카인이 가축을 치는 아벨에게 그렇게 했듯 이런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을 증오해왔다. 아마도 근본적으로는 유목민의 도래가 정주민들이 꾸며온 모든 체계와 질서를 와해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유목민은 정주민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며 거기에 동화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쿠체는 말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노마드에 대해 사유했던 대표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역시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가지지 않으므로, 노마드는 정체성 없는 익명의 힘으로 들이닥쳐 정주민을 파괴한다. 정체성 없는 이러한 힘의 침입을, 그 파괴력을 강조하여 ‘전쟁 기계’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전쟁 기계의 기원은 황제의 주둔병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목 생활을 하는 양치기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노마드의 출현으로 인한 파괴를 들뢰즈는 “탈영토화의 형식으로서 탈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거 유목민들의 삶이 보여주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노마드의 출현은 어쩌면 해묵은 정주민의 삶에 새로운 가치와 법을 도입하는 ‘창조’의 사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인의 원정, 지중해를 횡단하는 반달 부족의 원정, 스텝을 가로질러 가는 유목민의 원정, 중국인의 원정.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곳은 언제나 탈주선 위에서이다”(들뢰즈). 그런데 민족들이 투쟁하는 대륙에서뿐 아니라 철학의 평원에서도 동일하게, 노마드의 침입과 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노마드의 발견은 칸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 형이상학의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 아래서 전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단론자의 입법에는 예전 야만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법은 내란으로 인해 점점 무정부상태로 타락했다. 그 다음 회의론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정주하여 개간하는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과 같아서 종종 시민적 단합을 파괴했다.” 이 구절은 독단론적 성격을 가지는 합리론과 회의론으로 치달은 경험론의 싸움을 전제국가와 유목민의 극적인 상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륙의 독단론이 국가를 세우면, 영국 경험론의 노마드는 그것의 전제적 성격을 간파하고서 시민적 단합을 파괴한다.
그러니 영토를 닦아 합리론자들 이상의 체계를 세우려는 독일인들에게도 노마드는 하나의 위협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저 칸트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노마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독일은 끊임없이 토양을 갈고 다져야 한다. 다시 말해 건립해야만 한다. 건립하고 쟁취하려는 열정이 독일의 철학에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리스인들이 원주민들을 통해 소유했던 것을 독일은 정복과 창설에 의해 소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은 독일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이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철학의 내재적인 구도를 이동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토양으로 여긴다. 즉 그들은 그 구도를 바다 위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기만 하면 되는 열도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로 취급하는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텐트만 있으면 된다.”

노마디즘은 경험론적 성격을 가진다. 경험론자들은 텐트에 개념을 넣어가지고 이동하다가, 개념을 초원에서 마주치는 생경한 경험의 시금석에 대어보고서 평가하는 유목민 같다. <출처:NGD>
그리스인들이 원주민처럼 그들의 일상적 삶과 일상적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생래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면, 독일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겐 생래적이었던 사유를 학문적 개념의 형태로 애써 복원하여 다시 거주지를 형성해야 했다(예컨대 우리가 상실한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애써 일깨우며 사유를 진행한 하이데거에게서 보듯이 말이다). 반면 경험론자들은 유목민들로서, 개념을 텐트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오로지 경험에 노출시켜 개념이 작동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본다. 이러는 사이 비경험적인 체계로 지어진 정주민의 거주지는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노마드는 철학의 경험주의적 성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개념이다. 노마디즘의 한 예를 보도록 하자. 자신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칭하기도 하는 레비나스는 예술 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주적 성격을 지니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반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목주의(nomadisme)는 정주 상태로의 다가감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지 없이 체류하는 것이며, 대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관계이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를 내세우며, 하이데거는 예술을 거주함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이해했다. 횔덜린의 시 ‘라인 강’은 라인 강이 본래적으로 있어야 할 거주의 자리를 밝혀준다. 예술작품으로서 그리스 신전은 그리스 민족이 본래적으로 거주하며 살아가는 자리를 열어준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유목적 삶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뿌리내림과 거주함의 바깥, 고향 상실이 본래성이다!” 예술은 우리가 익숙하던 거주의 자리에서 벗어나 우리를 유목민처럼 낯선 지역으로 내몰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노마드적 사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노마드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성찰을 진행한 또 다른 철학, 바로 또 다른 경험론자 들뢰즈의 철학을 위해 노마디즘의 정수 자리를 남겨 두어야겠다. 정주민적인 사상가들이 동일성이나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속에 가축들을 가두어 놓듯 존재자를 가두었다면, 어떤 개념의 울타리도 없이 존재자들을 방목하고자 했던 것이 들뢰즈의 노마드적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주저 [차이와 반복]에 ‘방목하다’라는 말의 고대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을 남기고 있다.
“방목하다라는 말의 목축적 의미는 나중에서야 토지의 배당을 함축하게 된다.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관건은 땅을 짐승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들 자체를 분배하고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등의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배분하는 데 있다. 노모스는 우선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는 가령 마을 주변의 평야처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마드’라는 주제 역시 탄생한다.”
애초에 가축을 가르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목축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명확한 경계가 없는 장소에 가축을 풀어놓는 일, 유목이었다. 방목의 이러한 의미를 존재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개념적 울타리를 통해 존재자에게 존재를 배분했던 것이 아니다. 경계 없는 존재 위에 존재자를 직접 풀어놓는 것이 관건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철학사를 통해 경험론적 사유가 이 과제에 도전해 왔다.
가령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단일한 것으로 지각된 순간 속에는, 이성이 발견해내는 수많은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이미지들,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균적 지각이 동일성을 지닌 사물로 보는 것의 배후에는 수많은 지각의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이 동일성의 원천으로 저 피안에 있는 이데아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충실하자면,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순간의 수많은 다른 지각들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일성의 개념(울타리)에 매개하지 않고 존재자를 직접 존재의 대지 위에 풀어 놓는 존재론적 유목이 아닌가?
이러한 유목적 사유는 계사(繫辭)에 대한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계사를 통해, 주어 자리에 오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에 술어 자리에 오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 안에 있는 것은 동일성 개념이나 그에 부속하는 성질 개념에 매개되지 않는 감각들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est/is) 푸르다’는 동일성 개념에 매개된 존재자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즉 계사의 정체는 접속사인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임’과 ‘푸름’의 가변적인 배치(agencement)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랭보의 표현을 빌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un dérèglement de tous les sens)”라 일컬을 수 있는 세계이며, 개념의 울타리 없이 존재자를 존재 위에 풀어 놓는 사고이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로부터 정주민의 도시를 위협하는 유목민의 저 전쟁 기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재앙인가? 오히려 존재자들을 동일성이나 신학적 질서를 표현하는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 존재 위에 개방하여, 존재자들을 새롭게 배치해보라는 행운이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억압적 효과들을 발휘하는 개념의 체계 바깥에서 존재자들을 방목해볼 최초의 행운, 유목적 삶의 행운 말이다.

- 글
-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익명의 밤],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등의 저작이 있다.
- 저자의 책 보러가기 인물정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