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崔勝子] - 고독한 자의식의 신음 소리

난자기 2016. 9. 7. 10:35

최승자(崔勝子, 1952~ )의 시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김현)이거나, “지금, 이곳의 세계를 근원이 상실된 삶의 세계로 파악하고 (……) 동시에 그 근원 상실을 생래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정과리)있는 것으로, 혹은 “아직도 자본주의적 질서에 물들어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는 부정성의 언어를 밀고 나감으로써 그러한 세계의 오염을 견뎌내려는 고독한 자의식에 붙들려”(이광호)있다고 이해된다.

최승자 시에서 ‘아버지’는 핵심적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시인의 세계에 대한 도저한 절망과 부정은 납득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 팔십년대는 치욕”이라고 할 때 그 공포와 치욕의 삶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최승자의 시는 내내 그 공포와 치욕과의 싸움이고, 그것들을 가져온 ‘아버지’와의 싸움이다. 최승자의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는 그 공포와 치욕에 대한 방법적 부정이다.





최승자는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수도여고를 거쳐 1971년에 고려대학교 독문과에 입학한다. 고려대 재학중에 교지 《고대문화》의 편집장을 맡은 최승자는 유신시대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학교에서 쫓겨난다.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한 채 대학교를 나온 최승자는 학교 선배인 정병규가 주간으로 있던 <홍성사> 편집부에 들어간다.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우리 시대의 사랑」 등 몇 편의 신작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최승자는 얼마 있다가 <홍성사>를 그만두고 그 뒤로는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채 번역문학가로 활동하며 시작활동에 전념한다. 1993년에는 미국 아이오와대학 창작 프로그램에 다녀오기도 한다. 이제까지 그녀는 다섯 권의 시집을 내놓는데, 『이 시대의 사랑』(1981), 『즐거운 일기』(1984), 『기억의 집』(1989), 『내 무덤, 푸르고』(1993), 『연인들』(1998)이 그것이다.





최승자는 1980년대 시인이다. 황지우가 “갈 봄 여름 없이, 처형받은 세월”이라고 말하고, 정과리가 “완벽한 유죄성의 시대”라고 명명한 1980년대는 초토이며 저주받은 연대였다. 그 1980년대는 살아남음 자체가 죄였고 부끄러움이었으며, 어떤 죽음들은 빛나는 양심의 선택으로 기림을 받았다. 삶의 비극성이 속수무책으로 깊어져버린, 그 1980년대의 치욕, 상처, 죽음을 개체성의 몸 체험으로 수렴하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최승자라는 이름은 한 개별자의 이름을 넘어서서 1980년대적 시인의 보통 명사이다.

최승자의 시는 삶의 근원적 의미의 체계가 송두리째 거덜나버린, 그 텅 빈, 음산한 죽음의 연대 위에 어쩔 수 없이 삶의 체계를 세울 수밖에 없는 자의 가열한 절망과 부정의 언어를 보여준다. 자신을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1) 이라고 인식하거나, “허무의 사제”라고 선언하게 한다. 그 80년대가 “오 맞아 죽은 개가 되고 싶다 /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되고 싶다”2) 라는 최승자의 도저한 피학주의(被虐主義)를 낳는다.

최승자는 죽음의 시인이다. 그녀만큼 한결같이 죽음을 노래한 시인은 흔치 않다. 그녀의 모든 시는 죽음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녀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부터 후기 시집인 『내 무덤, 푸르고』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그 시공간을 죽음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채워 놓는다.

쳐라 쳐라 내 목을 쳐라. / 내 모가지가 땅바닥에 덩그렁 / 떨어지는 소리를, 땅바닥에 떨어진 / 내 모가지의 귀로 듣고 싶고 / 그러고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 나의 눈은 눈감을 것이다.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그녀의 첫 시집인 『이 시대의 사랑』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죽음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왜 그녀는 그토록 죽음에 집착하는가? 이 끔찍한 죽음에의 열망과 죽음에의 예감은 ‘일찍이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삶에 대한 방법적 부정의 한 양식이다. 또한 죽음은 삶의 소진이지만, 그 소진, 혹은 무의미한 세계에 내던져진, 의미가 없는 삶의 소멸이야말로 빛나는 승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 마른 빵에 핀 곰팡이 /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 쥐구멍에서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 떨어지는 유성처럼 /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 나는너를 모른다 나는너를 모른다. / 너당신그대, 행복 / 너, 당신, 그대, 사랑 // 내가 살아 있다는 것, /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시인에게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 마른 빵에 피어난 곰팡이, 오줌 자국, 천 년 전에 죽은 시체이다. 시적 자아의 삶을 허용한 이 세계는 어쩐 일인지 그 삶의 의미를 일궈내려는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세계는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등을 돌려 버린 변심한 애인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나’도 그 버림받은 생을 방기(放棄)해 버린다. 의미의 일궈냄을 허락하지 않는,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세계에서의 살아있음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으며, 그때의 삶이란 ‘푹 젖은 휴지조각’이며, 인생은 ‘퓨즈 타는 냄새’를 풍긴다.

최승자는 여전히 죽음과 싸우고 있다. 아니 그 싸움은 필사적이다.

 “보이지 않는 벽에 들러붙어 / 천천히 나는 녹슬어 간다”3)라는 시구가 암시하듯이 자신을 산화시키는 현실과, ‘너무 좁은 감옥’인 현실 속에서 ‘아직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살해’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죽고 싶은 ‘나’의 의지를 배반한 누군가에 의한 삶인데 그 살려둠은 시인의 자의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삶이기 때문에 무자비한 살려둠이다. 인간다운 존엄과 의미가 부재한 삶은 ‘부재적 실존’이며, 자신은 ‘부재들 중의 부재로서’ 피어난 검은 독버섯이다. 그 삶은 욕된 삶이다.

그 욕됨, 모독된 삶으로부터 육탈하는 길은 자신의 삶을, 흔적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삶의 흔적은 ‘치욕의 망토’이며 시인은 그 흔적들을 ‘다 남김없이 주고 다 남김없이 벗어주리라’라고 외치거나, ‘죽음이여 너는 급행열차를 타고 올 수는 없는가’라고 죽음에의 능동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이 간절한 죽음에의 열망을 불러 일으키도록 한 것, 무한 팽창하는 삶의 한없이 나른한 권태와, 욕됨과, 헛됨 뒤에 있는 것은 시적 자아의 삶을 짓밟는 ‘아버지’다.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 최승자,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

최승자에게 세계는 시적 자아를 ‘독 안에 든 쥐’처럼 생각하게 하는, 근본적으로 공포의 대상이며, 억압의 대상이다. ‘나’는 그 세계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 세계가 언제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며, 지레 겁에 질린 채 앙앙대거나 죽겠다고 협박도 해본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요지부동이다. 그 세계는 “내 실패들의 전시장 / 내 상처의 쓰레기 더미”4)이다. 그 세계에 ‘흐르는 빗물은 모두가 나의 피’고, 세계는 이미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으며, 그래서 그 세계에 오는 가을은 개 같은 가을이거나 매독 같은 가을이다. ‘나’의 삶에서 보람과 의미를 탈취해 간 그 세계의 뒤에는 ‘아버지’가 있다.

…… 짓밟기 잘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 나는 잠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 나는 내 피의 튀어 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 잠의 잠 속에서 싸우고 꿈의 꿈속에서도 싸웠다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1980년대는 ‘아버지’에 대한 악성 신화의 시대였고, 시인은 그것을 원체험으로 갖고 있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억압자 / 피억압자의 구도로 드러나며, ‘나’의 모든 절망과 불행은 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그 아버지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아버지다. 그 아버지는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 하늘의 늙은 니힐리스트” 즉, “몇 천 년 전부터 다만 헛되이 /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하여” 공중에서 허무의 기계를 돌리는 신이다.5) 또한, 아버지는 ‘수십억의 군화처럼 행군해’온다.

군화가 남성적인 것이며, 전쟁, 폭력, 광기와 같은 의미를 거느린 상징이라면, 이 세계의 불모성이 바로 그 군화처럼 행군해오는 가부장적 세계의 권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품고 있다. ‘나’의 삶을 두 발바닥으로 짓누른 채 서 있는 아버지는 유신 시대와 광주 학살의 그 독재자들이며, 세속화된 신이고, 가부장적 세계의 일체의 권력 기반 그 자체이다. 시인에게 남은 것은 그 아버지들과의 필사적인 싸움이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패배가 인정되어 있는 싸움이다.

‘나’는 인생을 똥으로 만들어버린 모든 아버지를 부정한다. 시인은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 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하는 거듭되는 부정 속에 가둬버린다. 최승자는 1980년대의 어떤 반체제 투사 시인보다 더 강하고 통렬하게 아버지들, 즉 우리 삶에 억압적 권력을 휘두르던, 심리적 억압의 아버지로 존재했던 독재자들을 비판 부정한다.
그러나, 시원(始原)의 아버지는 세상에 빛을 뿌리는 태양과 같은 존재이며, 가슴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기조차 하다. ‘나’는 그 아버지에게 다가가기를 희망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미 권력이 거세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 박씨보다 무섭고, /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 저렇게 새싹처럼 보일 수가. // 내 장단에 맞춰 / 아장아장 춤을 추는, / 귀여운 내 아버지, / 오, 가여운 내 자식.
―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문학과지성사, 1993)

늙은 아버지란 과잉의 억압을 행사하던 권력이 거세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꿈속에 상투 머리 길게 풀어헤치고 나타나 ‘이제 그만 가자, 가자’고 청유하는 ‘허망의 아버지’다. 허망의 아버지란 헛것, 실재가 없는 아버지다. 그 아버지는 더 이상 공포의 존재도 아니며, ‘나’의 여성성을 억압하지도 않는다. 그 지긋지긋하던 아버지, 독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아버지가 늙어 그 힘을 잃어버리자 이제는 ‘움트는 새싹’처럼 사랑스럽다. 삶의 일체 의미를 박탈해버리던 억압적 권력자이며, 현실을 지배하는 신이었던 그 아버지는 이제 ‘나’의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가여운 내 자식’이다.

사랑하는 애기 동자, / 넌 어느 시대 적 아이니? / 네가 태어났던 게 구석기 시대니, 이십세기니? / 언제부터 날 쫓아다녔니? / 내가 그렇게 인정 많은 아줌마로 보였니? / 그토록 내 몸에 들고 싶었니? / 그러면서도 왜 내 꿈엔 나타나지 않았었니? // 난 나만의 일로 바빠 / 널 알아차리지 못했었구나. // 넌 왜 흙으로 돌아가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 그렇게 몇 세기를 불안하게 떠돌아다녀야 하니? / 몹시도 쉬고 싶겠구나? / 지금이라도 들어오고 싶다면 들어오렴. / 그러면 나 죽는 날 함께 흙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 하지만 내 몸은 늙어 젖도 안 나올 텐데. / 그때까지 어떻게 널 먹여 키워야 할까? // 동자 보살, 동자 보살, / 네 엄마가 누구니? // 혹시 내가 네 엄마였었니?
―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문학과지성사, 1993)

첫 시집에서 삶과 꿈을 짓밟는 무법적인 존재였던 ‘아버지’는 의 최근 시집인 『내 무덤, 푸르고』에서는 힘없이 늙은 아버지, 아장거리는 아기, 애기 동자 등으로 변주된다. 가부장적 권력을 지워버린 아버지인 ‘애기 동자’는 몸 없이 공중을 떠도는 넋이며, 여자의 자궁으로 돌아가 다시 몸을 받아 신생의 삶을 얻어야 할 죽은 아버지다. ‘나’는 안식을 얻지 못하고 떠도는 가여운 아버지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 아버지의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한다.

모든 딸들이란 아버지들을 낳는 신성한 어머니, 대지모신(大地母神)이며, 그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나온 아버지들은 다시 무수한 지상의 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순환 관계에 있다. 이 시는 늙고 병든 아버지는 대지모신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여 신생의 몸을 얻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제의적 상상력을 펼쳐 낸다. 그토록 오랫동안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던 살부의식(殺父意識)은 엷어지며 아버지로 인해 덧난 상처도 서서히 아무는 징후를 보여준다.

최승자의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이미지는 ‘자궁’이다. 여자의 자궁은 출산과 모성의 근거이며, 신화적으로 다산과 재생을 뜻한다. 그러나 최승자에겐 그 자궁은 더는 생명을 출산할 수 없는 불모성의 무덤, 죽은 바다(혹은 오염된 바다), 폐허이다.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 (……) / 모래 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 최승자,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

여성의 몸은 ‘거대한 사원의 폐허’, ‘죽은 바다’, ‘모래 바람 부는 내부’와 같은 죽음과 불모성의 이미지들로 나타난다. 이 시는 여성적인 것, 혹은 생명적인 것에 대한 이 가부장적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의 수탈과 억압이 결국은 이 세계를 일체의 생산성을 상실한 죽음의 대지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종말론적 위기에 대한 통찰과, 동시에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자궁의 회생만이 죽어가는 이 세계를 되살려낼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최승자의 시에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분만을 기쁨을 노래하는 시가 없다. 그녀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낙태와 사산(死産)의 이미지들이다. 마취를 통한 의사 죽음의 경험과, 낙태에 의한 인공적 생명 탈취라는 불행한 여성 경험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들은 유혈이 낭자했던 1980년대의 우리 삶에 드리웠던 죽임의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의 불임성, 즉 이 세계가 “건강한 생산성을 상실한 병든 세계”6)라는 사실과, “이 지상적 삶이 죽음밖에는 잉태하지 못하는 삶이라는 전제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 특유의 자궁과 결부된 분만의 은유를 의사 죽음의 장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것을 통한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형된 욕망”7)드러내기임을 보여준다.

자궁을 병들고 오염시킨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타락한 아버지들이 여성들의 자궁을 황폐한 불모로 만들었다. 자궁, 그 생명의 원초적 자리가 훼손되어 불임의 자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삶이 더 이상 사회적 의미의 생산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혼탁하게 오염되었음을, 그리하여 우리 삶이 끝 없이 불모화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최승자의 시를 떠받치는 것은 파괴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어떤 독기(毒氣), 죽지 못하고 누추한 삶을 꾸려가는 데 대한 풍자와 욕설이었다. 그것들은 지난 80년대의 황당무계한 죽임의 문화에 대응하는, 충분히 공감되는 세계였다. 이 세계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최승자는 그것을 다채로운 죽음의 이미지들, 즉 몸속에 말뚝 뿌리로 박혀 있는 아버지, 병든 자궁 등과 같은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1980년대의 삶의 절망과 부정을 섬뜩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승자 [崔勝子] - 고독한 자의식의 신음 소리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