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공동체와 타자의 문제 / 김성민
환대의 공동체와 타자의 문제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타자이해를 중심으로
김성민 (현대철학연구자)
1. 주체에 대한 새로운 논의와 이질성
1) 현대철학이 문제 삼고 있는 주제 중에 대표적인 것이 ‘주체’이다. 근대적 주체 개념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현대철학이 갖는 비판점의 중요한 부분이다. 보통 주체성과 동일성을 같은 용어로 사용하는데 이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동일성이 어떻게 확정되고 확보되느냐의 문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의 주체와 현대의 주체가 다른 점은 근대의 주체가 ‘자기 촉발’(auto –affection)을 통해 수립된다면,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대표하는 현대의 주체는 ‘이질적인 촉발’(hétéro-affection)에 의해 주체의 동일성이 구성되고 가능하다. 근대의 자기의식에 매개되지 않고 이질적인 것의 개입이 주체에 죽음을 가져오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 주체는 어떻게 성립되는지가 곧 주체와 타자의 관계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근대의 자립적인 자기의식화된 주체가 불가능하다면 현상학적 상호주체성의 논의가 공동성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근대의 주체 개념을 자세하게 논할 수는 없고 여기서 레비나스가 헤겔의 주체 이해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시작해보자. 레비나스는 헤겔의 주체의 동일성의 이론은 자기의식과 자기의식에 의해 매개되는 실체 즉 전적으로 자기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실체성이 확립된다. 이때 실체는 자기의식이 촉발하고 도달한 존재와 일치한다. 헤겔에게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것으로 자기 동일성이 수립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식은 자기촉발을 통해 의식하는 자(주체)로, 그리고 존재하는 자(실체)로 수립되며, 이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다.” 결국 근대철학에서 존재자와 주체 그리고 사유는 일치한다. 이것은 자기촉발에 의한 존재의 일치로서 주체의 동일성에 다름 아니다.
3) 레비나스는 이러한 근대철학의 주체의 동일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자기 자신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절대적인 수동성을 통해 만들어진다.” 절대적 수동성에 의해 주체가 세워진다는 말인데 이는 근대철학의 주체의 능동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왜 주체의 동일성이 자기의식에 의해 스스로 확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질적인 것의 촉발 없이(자기의식과는 다른 수동적인 이질적인 것의 개입 없이) 주체는 자기성을 세워갈 수 없다는 주장인데 여기에 타자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위치한다.
4) 데리다를 통해서 다시 레비나스에게로 돌아와 보자. 데리다가 그의 책 <그라마톨로지>에서 전통적으로 문자보다 목소리에 우위를 두어왔던 철학에 대해 비판하면서 문자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목소리는 자기-촉발의 대표적인 표현이자 영혼의 상태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목소리는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이서 자신이 듣는 것이고 타자가 듣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소리야말로 자발적인 자기촉발의 대표적인 예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곧바로 청취할 수 있고 그의 반향도 그대로 의식에게로 되돌아온다”(2권, 221쪽)고 한 이유이다. 즉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기는, 자기의식이 그 목소리를 인식하고 이 인식은 타자가 자기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보편적인 것이 된다. 결국 헤겔은 언어가 순수한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언어는 자아가 밖으로 소리를 내고 그것이 타자에게 그대로 가닿는다는 동일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데리다는 목소리와 목소리에 대한 의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차연(différance)를 제거한 결과로서의 자기촉발현상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로의 현존이 ‘연기’(différer)되고 스스로에 대해 ‘차이’(différence)를 지니는 두 가지 이질적인 사태 즉 차연을 제거해야만 자기의 목소리가 목소리에 대한 자기의 의식이 일치할 수 있는 자기 촉발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자기촉발 이전에 이질적인 사태의 간극에 의한 이질적인 것의 촉발이 놓여 있다. 데리다는 이것을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하는데 보통 ‘흔적’(trace)이라고도 용어로도 사용된다. 에크리튀르의 대표적인 예는 분절(articulation)이나 틈새(brisure) 인데, 곧 차이가 분절이다. 에크리튀르는 언어적인 틈새와 분연속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무리 구어라고 하더라도 문자 표기의 분절 없이는 전달되지 않으면서도 이 분절은 자기의식에 의해서 제대로 사유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분절은 자기의식에 의해 매개되지도 의식되지도 않는 이질적인 것이다. 주체는 도저히 자기의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흔적을 통해 주체성이 구성되기도 하고 와해되기도 한다. 에크리튀르의 개입 즉 이질적인 것의 촉발에 의해 자기촉발이 매개되고 추동되기 때문에 자기촉발은 이차적인 것이자 이질적인 것의 촉발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이다.
2. 윤리적 타자의 초월성
1) 레비나스가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타자에 대한 이해도 이러한 동일자의 표상화 내지 개념화를 벗어나는 이질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얼굴을 통해 현현한다고 말함으로서 현전성과 외부성을 혼돈하는 경향이 있는데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이런 모순적 언어 사용에 대해 비판적이다. 데리다에게 타자는 초월적 외재성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이해는 단지 전체화되지 않고 동일자에게 포착되지 않는 타자성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타자를 자기의식에 의해 종합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비판을 일면 벗어난다. 말하자면 타자는 단순히 자아의 부정태가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타자의 타자와 같은 자아의 대립물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는 동일자 외부에 있으면서 동일자가 영원히 욕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타자는 주체화되거나 그렇다고 단순히 익명적인 존재로 환원되지도 않는다.(TI, 28)
2) 그러나 레비나스는 자기 동일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자아(동일자)는 지속적으로 타자의 타자성을 자기 동일성 안으로 흡수하고 통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레비나스가 상호주관성의 타자성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상호주관성은 타자를 자율적인 주체로 상정함으로써 자아와 타자 사이에 상호주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주체에 기반하여 세계를 타자와 함께 구성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타자가 자아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위상에 있다는 상호성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유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주체의 확장이 갖는 폭력성과 제국주의적 특성을 고발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는 자시에게서 근거지어진 것이 아니라 타자의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자유가 타인에 대한 윤리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올바른 자유가 된다(TI, 86). 타자에 의해 주어진 자유는 이미 문제제기 된 자유과 제한된 자유이다.
3) 타자는 자아에 의해 포착되고 소유되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분리된 존재이다. 대화를 통해 타자와 자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이미 자아의 포섭에 다름없다. 오히려 “전체성의 재구성을 방해 하는 근본적인 분리”(TI, 29)가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나에게 포섭되지 않는 존재가 부재하지 않으면서도 은폐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부름으로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관계야말로 유아론적 주체성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주체는 끊임없이 타자를 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타자의 연약함 속에서 개방된 형태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4) 이러한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 얼굴(visage)이다. 타자는 외재성을 갖고 있기에 비가시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얼굴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이 얼굴은 타자의 초월성을 열어주는 현실적 계기이다. 타자는 연약함, 벌거벗음의 얼굴로 나에게 현현한다. 권력없음, 무방비성 등을 통해 자기를 살해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연약함의 얼굴을 가진 타자의 무한한 요구에 자아는 자기 안에 머물지 못하고 윤리적 요청에 부름을 받는다. 타자의 얼굴은 윤리적인 요청이다. “얼굴은 이미 무능력이다. 왜냐하면 얼굴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을 찟어버리기 때문이다.”(TI, 216) 타자는 비천함(humilite)으로 자아의 권력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3. 이질적인 것: 타자의 조건
1) 주체의 동일성은 이질적인 개입에 의해서 완전히 해체되어 버리는 문제는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현행하는 공동체의 구성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질적인 것이 개입되면서 이차적으로 자기 동일성이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자기의 동일성에서 자기의식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의 개입이 우선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공동체의 성격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2) 그렇다면 이질적 인 것이 공동체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데리다의 후기철학을 잘 대변해주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그는 이질적인 것 즉 ‘현행적으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배우려면 ‘죽은 자’의 이질적인 주제와 연결시켜야 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 그것을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자기 혼자서 배운다는 것, 자기 자신에게 사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마지막으로 사는 법에 대해 배우겠습니다.”)은 살아있는 존재자에게는 불가능 한 것이 아닌가? […]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어떤 경우든/어쨌든 타자로부터 삶의 가장자리에서. 내적인 가장자리 또는 외적인 가장자리에서,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의한 교육인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 10)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삶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죽음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 양쪽에 모두 속하는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환영과 함께 함으로 가능하다.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결코 그 자체로 현존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한 유지의 노력, 대화의 과정, 동행과 견습 과정 등은 환영들과 교류 없는 교류를 통해, 환영들과 함께 함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더 낫게 살기가 아니라 더 정의롭게 살기이다. “거기에 함께 없이는 어떠한 타자와 함께 존재하기도,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또한, 단지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일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 12)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자체는 환영과 함께 살기의 불가능성이다. 이처럼 불가능한 삶에 유령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살아 있지 않는 것들과 함께 하는 것이 없이는 타자로부터 오는 정의로운 삶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유령적 존재에 대한 물음 없이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이렇게 자아의 타아에 대한 인식 이전에 유령적 존재와 같은 이질적인 존재자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 이질적인 존재는 현존하지만 포착되지는 않으면서 현존하는 자들에 대한 삶과 사는 법에 대한 조건을 제공한다.
현재 살아 있는 것/생생한 현재를 은밀하게 어그러지게 하는 것없 이는, 거기에 있지 않은 이들, 더 이상 현존하지도 살아 있지도 않거나 아직 현존하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들과 관련된 정의에 대한 존중 및 이러한 책임 없이는, “어디로?”, “내일은 어디에?”, “어디로 whither?”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르크스의 유령들>, 13)
4) 결국 이런 조건은 우리의 삶을 경계 위의 삶으로 규정한다.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과 현실성 너머, 삶과 죽음의 흔적으로 인해 자기 동일성이 어긋난 경계 위의 삶으로 조건짓는다.
이러한 정의가, 현존하는 생명 너머로 또는 이 생명의 현실적인 거기에 있음 너머로, 그것의 경험적이거나 존재론적인 현실성 너머로 생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죽음을 향해서가 아니라, 경계 위에서의 삶을 향해, 곧 삶이나 죽음이 그것의 흔적들이며 흔적의 흔적들일 어떤 흔적을 향해, 그것의 가능성이 미리, 현재 살아 있는 것/생생한 현재 및 모든 현실성의 자기동일성을 어긋나게 하거나 어그러지게 한 어떤 경계 위에서의 삶을 향해. 이렇게 되면 어떤 정신/혼령이 존재한다. 정신들/혼령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려해야/셈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 이상인 그것들을 고려하지/셈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고려할/셈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 이상인 그것을/더 이상 하나가 아닌 그것을.(<마르크스의 유령들>, 15-16)
5) 현존하는 삶은 ‘경계 위에서의 삶’인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 죽은 자들과의 관계가 중첩되고 혼재하는 자기동일성이 어긋나 있는 삶이다. 이 어긋난 삶의 층위에 타자가 끼어들어 있고 하나 이상으로 존재하기에 나와 함께 그들을 고려하고 계산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 이상으로 현존한다고 할 수 없기에 그들을 계산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반드시 그들을 고려하고 셈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촉구이며 이것이 정의의 계산 (불)가능한 유령성이다. 이것은 자기 동일성과 타자의 관계 이전에 경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한 이유이며, 이 경계 위의 주체성의 문제를 피하고서 타자에 대한 논의가 정의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은 지속적으로 타자를 자기에게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자기로 환원되지 않고 그렇다고 또 다른 자기로서 타자로 인식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질적인 유령성에 대한 사유는 요청된다.
6) 데리다에게 이러러한 계산 불가능하고 해체에 의해 환원되지 않는 해체불가능하면서 해체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타자’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정의로서의 도착하는 이(arrivant)의 절대적이고 예견불가능한 독특성”을 타자라고 명명한다(<마르크스의 유령들>, 71쪽). 그리고 이 예견불가능한 이질성이야말로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무한하게 비대칭적이고 만들고, 타자를 초과한다. 말하자면 타자는 자기의식에 의해 한정되거나 제한되지 않으며 절대적인 이질성이 자아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데 이 비대칭성은 무한하다.
4. 도착하는 이와 환대의 공동체
1) 데리다는 이런 해체불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의 문제와 마르크스적 해방의 약속을 연결시킨다. 이 약속은 “어떤 구조적인 메시아주의의 형식성, 종교 없는 어떤 메시아주의, 심지어 메시아주의 없는 어떤 메시아적인 것이며, 어떤 정의의 이념일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 130-131) 해체불가능성에서 메시아적인 것이 이야기 되는 이유는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어긋나게 하여 규제적이거나 유토피아적으로 미래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이 메시아적인 것은 ‘미래의 현재’ ‘생생한 현재’의 미래 양상이란 면에서 항상 도래할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도래할 민주주의의 이념의 무한성은 현재의 규정된 형태의 부적절성을 고발하는 어긋남을 만들어낸다.
2)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한 메시아적 희망은 예견 불가능한 타자성의 도래와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된다. 이것은 일종의 종말론적 관계의 유지를 의미하는데, “기대의 지평 없는 기대, 아직 기다리지 않는 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것에 대한 기다림, 유보 없는 환대, 도착하는 이가 불러일으키는 절대적인 놀라움에 대해 미리 제시된 환영의 인사”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 140) 이는 일정한 계약에 의해 공동체(가족, 국가, 국민, 영토, 지연과 혈연, 언어, 심지어 인류 자체)를 형성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그 어떤 소유권과 권리도 포기하는 “타자 자체로서 사건”에 대한 “메시아적 개방”을 요청한다. 이 메시아적 개방을 데리다는 “유령성의 장소 그 자체”라고 말한다.(<마르크스의 유령들>, 140-141)
3) 데리다는 도래할 민주주의의 국제적 형태의 출현을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 명명한다. 이는 신분과 직위나 호칭 없고 은밀하지도 않고 공적이지도 않으며 계약을 맺지도 않으면서 결집 없이 “당과 조국, 국민 공동체 없이, 공동 시민권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인 소속 없이 이루어지는 비동시대적 연대이다.”(<유령들>, 173-174) 이는 “새롭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방식으로 동맹시키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제도 없는 어떤 동맹의 우정”(<유령들>, 174)과 같다.
4) 환대의 문제는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맥락을 전제로 하고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의 개념을 무조건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의 절대적 법칙은 “문지방 또는 경계선의 엄밀한 획정 가능성”에 대한 사유와 다름 아니다. 이는 “가족적인 것과 비가족적인 것 사이의, 이방인과 비이방인 사이의, 시민과 비시민 사이의 경계”에 대한 비판적 사유이다. 그리고 환대는 공권력의 공공 사용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있다. 공적인 투명성에 의해 국가에 저항할 권리는 파괴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절대적 환대는 이루어질 수 없다. 도래할 민주주의로서 절대적 환대는 이방인이 주인을 구하는 방식이다. 일정한 국가가 도착하는 이를 규정하지 않고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리려 도착한 이에 의해 새로운 법이 재구성되도록 한다.
마치 이방인은 주인을 구하고 주인의 권력을 행하는 것이 가능할 듯이 말이다. 마치 주인이 주인으로서, 자신의 장소와 권력의 포로, 자신의 자기성(ipseite)의 포로, 자신의 주관성의 포로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인질이 되는-진실로 언제나 인질일-것은 주인, 초대하는 자, 초대하는 주인(hote)이다. 그리고 손님(hote), 초대받는 인질(guest)은 초대하는 자의 초대하는 자가 된다. 주인의 어른이 된다. 주인은 손님의 손님이 된다. 손님은 주인의 주인이 된다.(<환대에 대하여>, 134-135)
5) 주인과 손님이 되는 것은 동시에 불가능하지만(동시성의 불가능성),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은혜 없이는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다. 주인은 손님을 기다리게 하고 환대에 대해 욕망하도록 하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환대는 항상 시간적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항상 늦었다는 느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도착하는 이의 기다림을 미래에 두지 않고 현재에 둠으로서 동시적인 것은 불가능하지만 항상 환대를 뒤로 미루게 되면 이미 늦을지 모른다는 강박에 의해 환대는 시간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시간성을 띄게 된다. 이처럼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는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윤리적 요청을 넘어선다. 그러나 데리다는 환대는 성서의 환대(창세기의 아브라함의 환대와 롯의 환대)의 예를 통해 윤리적 문제와 요청 그 이상의 의미임을 밝힌다. (이 부분은 여전히 해석의 문제가 존재한다.) 롯은 소돔성에서 이방인으로서 손님을 보호하려는 일념으로 두 딸을 내어준다. 아브라함의 환대는 환대의 근본 뿌리를 제시하는 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대의 절대성이다. 환대가 이루어지는 지점은 이방인성이다. 정체성이 확고한 땅의 주인으로서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누구나 환대하는 절대적인 실행이 가능한 것이다.
6) 레비나스는 상호주체적 공간으로 생각되는 것은 모두 비대칭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외재성을 강조하는 것은 데리다의 환대의 절대성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그의 책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지속적으로 ‘동지들의 집단성’에 반대하여 ‘자아와 너의 집단성’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이 자아와 너의 집단성이란 공동체에 참여하는 집단성이 아니다. 즉 집단성이 갖는 제 삼항(매개자, 진리, 교리, 노동, 직업, 관심, 습관, 식사 등)에 참여하는 것이 이니라, 중재자도, 매개도 없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상호 교환적 관계도 무관심한 즉자적 관계도 아니다. 그러면서 히브리 성서의 고아와 과부가 타자라고 명명한다.
타인은 자아, 나가 아닌 것이다. 자아, 나는 강하지만 타인은 약하다. 타인은 가난한 자이며 ‘과부이고 고아’이다. 질서가 아주 잘 잡힌 자비를 발명한 것보다 더 큰 위선은 없다. 아니면 타인은 이방인, 적, 권력자이다. 본질적인 것은 타인이 그의 이타성 자체 덕분에 위에 열거한 성질들을 가진다는 점이다. 상호 주체적 공간은 무엇보다 비대칭적이다. 타인의 외재성은 단순히, 개념상으로는 동일한 것을 분리시켜 놓는 공간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공간적 외재성을 통해 나타나는 그 어떤 개념에 따른 차이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외재성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서 사회적 외재성은 근원적인 것이며, 우리가 단일성과 다수성의 범주들을 넘어서도록 만들어준다. 단일성과 다수성의 범주들은 사물들에 타당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홀로 떨어져 있는 주체, 혼자 있는 정신의 세계에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다. … [그러나] 비대칭적 상호 주관성은 초월의 장소이다. 이런 비대칭적 상호 주관성 속에서 주체는 완전히 주체 자신의 구조를 보존하면서도 숙명적으로 그 자신으로 회귀하지 않을 가능성, 출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미리 말하면, 주체는 아들을 얻는다.(<존재에서 존재자로>, 162-163)
7) 과부와 고아에 대한 절대적 환대는 타자에 대한 주체의 자유로운 결정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 이는 초월적인 장소를 만들어내는 조건이자 그에 상응한 윤리적 요청이다. 그런 점에서 이 윤리적 요청은 절대적이기에 윤리가 아니다. 상호 주체성은 새로운 생명의 출현이라는 미래에 현재를 열어놓는 개방성이다. 이 점에서 데리다와 더불어 레비나스도 공동체의 공동성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며, 일정한 동일한 이상을 가진 윤리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에 대해 데리다가 그의 타자성의 외재성과 초월성이 되레 폭력적일 수 있는 측면을 이야기하면서도 데리다 자신도 탈구적인 방식으로 타자성을 다시 논한다. 데리나다 레비나스에게 모두 타자는 주체의 동일성에 의해 보편적인 자아가 아니며 타자에 대한 응답으로서 간접적으로 이 동일성은 확보된다. 이 타자에 대한 응답의 의무 즉 타자에 대한 개방의 의무는 동일자에 대한 내적 분열을 초래한다.
“‘이 의무’는 … 유럽이 아닌 것, 한 번도 유럽이었던 적이 없는 것, 앞으로도 절대 유럽이 되지 않을 것을 향해 유럽을 열라도 명령한다. ‘이 의무’는 또한 외국인을 받아들여 그들을 동화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이타성을 인식하고 수용하도록 명한다. 이러한 환대의 두 가지 개념은 오늘 날 우리의 유럽적인 동시에 민족적인 의식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곶>, 64)
10) 타자에 대한 개방이야말로 분열을 초해하고 ‘자신과의 차이’ 즉 ‘자신과 함께, 그 자신 곁에 남아 있는 자기 자신에의 차이’를 인식하는 자기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응답이야말로 이들의 공동성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