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날 / 홍용성

난자기 2017. 1. 2. 10:28


원주에 왔다
청량리에서 막차를 타고
졸면 안된다
술 먹을 때마다
막차 탈 때마다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지금은 새벽 두 시,
오갈 데 없는 내가
원주역 대합실에서
이 시각에 할 일은
오직 되돌아가는 양평행
첫 열차를 기다리는 것뿐

텅 빈 대합실엔
국화꽃 화분 하나,
보라색 겹국화만
한밤중에 눈부시다

너를 바라보니
미당이 떠오르고
도연명이 보여서
너를
일부러 만나러 온 것처럼
화첩속에 네 얼굴을 담는다
지금
이 한 밤중에 깨어 있는 것은
너와 나뿐,
둘이 하나되어 이야기를 나눈다

국화꽃 자태에 취해
그 모습 그리다가
또다시
돌아가야 할 첫차를 놓친다
아아,
나는 깨어 있다가도
갈 길을 잃는 자,
술에서 잠에서 깨어나서도
갈 길을 잃는 자

에라,
집에야 다음 열차로 가면 되지,
국화꽃 향기에 취해
벌처럼 나비처럼
실컷 놀다가 가리,
인생은
어차피 홀로 취했다가
때가 되면 깨어나는 것,
이곳에서도
새 날을 맞을 수 있는데
오는 날을
꼭 내 집에서만
맞으라는 법 있나,
새 날은
이곳에도
눈부시게 오는데,

아아,
지금은
새벽 5시
원주역 대합실에
새 날이 온다.

ㅡ홍용선, 새 날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