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소요유(逍遙遊) / 장주
난자기
2017. 3. 9. 10:43

무릇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파인 곳에 물 한 잔을 부으면
검불은 떠서 배가 되지만,
잔을 얹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두텁지 않으면
큰 날개를 실을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 리를 솟아
올라야 날개를 띄울 바람이
아래에 쌓이게 된다
그런 다음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지게
되는데, 누구도 그 앞을
막지 못한다
그런 후에야
아득한 남쪽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가까운 들로 나가는 사람은
세 끼만 준비해도 돌아와
배가 부르지만, 백 리를
가려는 자는 밤새워 방아를
찧어야 하고, 천 리를 가려는
자는 석 달은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매미나 비둘기들이 어찌
이를 알겠는가
ㅡ장주, 소요유ㅡ

<장자>는 짤막짤막한 우화나 일화들로 이어진다.
내편(內篇) 1편이자, 장자 사상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소요유(逍遙遊)’다.
대개 저서에서는 학자가 가장 중시하는 사상을 앞쪽에 두는데, 그런 의미에서 소요유는 장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장자는 소요유에 담은 이야기로 인간이 자신이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사상의 지향점을 밝힌다.
‘北冥有魚(북명유어) 其名爲鯤(기명위곤) 鯤之大(곤지대) 不知其幾千里也(불지기기천리야)化而爲鳥(화이위조) 其名爲鵬(기명위붕) 鵬之背(붕지배) 不知其幾千里也(불지기기천리야) 怒而飛(노이비) 其翼若垂天之雲(기익약수천지운) 是鳥也(시조야) 海運則將徙於南冥(해운칙장사어남명) 南冥者(남명자) 天池也(천지야)’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습니다
그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습니다.
그 등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번 기운을 모아 힘차게 날아오르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습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흉흉해지면, 남쪽 깊은 바다로 몸을 숨기는데,
그 바다를 하늘 못이라 하였습니다.”
장자의 사상적 주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화이위조(化而爲鳥,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다)’가 이 대목에서 등장한다.
특히 ‘화(化)’는 핵심어라고 할 수 있다.
곤과 붕은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다.
장자는 인간이 변화를 통해 현존보다 고차원적인 초월적 존재로 절대 자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붕이 날아오르는 원리다. 큰 몸집을 어떻게 공중에 띄우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장자는 이렇게 서술했다.
‘풍지적야불후(風之積也不厚) 칙기부대익야무력(則其負大翼也無力) 고구만리칙풍사재하의(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이후내금배풍(而後乃今培風) 배부청천이막지요알자(背負靑天而莫之夭閼者) 이후내금장도남(而後乃今將圖南)’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이승훈 시인이 편저한 <문학상징사전>(고려원)에 따르면 바람은 ‘숨결과 정신’을 뜻한다.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봤을 때 장자가 언급한 ‘바람’은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으로 탄생하는 활력을 상징한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 우화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곤이 붕새로 변하는 것처럼 인간도 꾸준한 수양을 통해 초월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이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지위’, ‘자본’, ‘견물생심’ 등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온을 찾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狙公賦芧曰’(저공부서왈) 朝三而暮四(조삼이모사) 衆狙皆怒(중저개노) 曰然則朝四而暮三(왈연칙조사이모삼) 衆狙皆悅(중저개열) 名實未虧而喜怒爲用(명실미휴이희노위용)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으레 이 우화는 셈을 못하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탓하거나, 말휘갑을 둘러 남을 속여먹는 거짓말쟁이를 비판하는 의미로 통용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장자는 인간을 원숭이에 빗대 인간의 좁은 도량을 꼬집었으며, 원숭이의 행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만물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장자는 조삼조사 일화를 통해 ‘天均(천균, 하늘의 고름)’, ‘兩行(양행, 두 길을 걸음)’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각각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게 하는 하늘의 공정함”,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경지”라는 뜻을 지닌다.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말로 양쪽을 조망하라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조삼모사에 나오는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
지위나 재산 등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와 타자 간의 구별 짓기를 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장자는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를 ‘도’로 보았다.
여기서 ‘도’란 만물이 모두 평등한 ‘제물(祭物) =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좌망(坐忘)’과 ‘심재(心齋)’이다.
좌망은 조용히 앉아서 육체와 감각 등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잊어버려 몸도 마음도 텅 빈 상태가 되는 무아의 경지에 오르는 행위를 일컫는다.
심재는 마음 속에 산재한 잡념이나 상념을 떨쳐버리는 것을 말한다.
좌망과 심재가 극에 다다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사실 장자의 사상은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사회규범, 제도 등을 완강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자의 사상이 현대사회에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해 도달한 현대 물질문명 사회의 피로 때문이다.
소비가 사람의 지위를 나누고, 학벌이 성공을 보장하는 사회는 개인들을 끊임없는 경쟁 속으로 밀어 넣고, 끊임 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도록 만들고 있다.
거기서 비롯되는 피로감과 탈출의 욕구, 즉 경쟁과 비교의 사슬을 끊고 초연하고 호방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남을 고르게 보는 시각, <장자>에서 찾아보자.

한편 <장자>에 대한 이 같은 주류 해석과 달리, 장자를 일체의 초월적 형이상학을 거부한 아나키스트적 삶의 철학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진정한 자유란 종교, 국가, 자본 등 초월적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우리의 삶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장자의 철학은 시종여일하게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자 철학을 전공한 강신주 박사는 지난 해 펴낸 저서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이라는 책에서 “장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유가 모두 개체의 삶보다는 초월적 이념을 긍정하는 철학, 다시 말해 삶의 유쾌함을 부정하고 죽음의 우울함 혹은 초월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꿈’에 불과하다고 고발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장자의 철학을 노자 사상과 결합시켜 초월적 가치를 중시하는 도가철학, 나아가 도교의 근원으로 읽는 주류의 독법은
<장자>를 물구나무 세운 것이 된다.
- 베리타스알파(김유하 기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