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기적 / 원구식
1
나는 살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하루에 두 번씩
어제도 탔고,
오늘도 탔고,
내일도 탈 것이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김밥 옆구리 터지 듯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저 물결을 헤치고
자리를 잡는 데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곧 혁대 파는 아저씨가 좀비처럼 지나갈 것이다
뒤를 이어, 중국산 등긁개 파는 장애자,
불빛이 나오는 귀후비개 파는 아이,
껌 파는 할머니,
바퀴벌레 약 파는 아줌마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곤 손때 묻은 쪽지를 돌리고
볼펜 파는 국가유공자,
그의 연설이 끝나면
이제 기적이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혼잡한 승객들 머리 위로 불쑥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십가가가 고통스럽게 지나간다
그는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이 땅굴 속에서 날마다 부활하는가?
이 성스러운 순간에도 젊은 여자에게
은밀하게 몸을 밀착시키는 성추행범들,
미꾸라지처럼 교활하게 다가가
모래무지처럼 시침을 뚝 떼고 창밖을 내다본다
이윽고, 환승역에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썰물 처럼 빠져나가고 밀물처럼 다시 밀려 들어온다
한 여자가 그 틈을 타 자리를 잡고는
손길이 분주하게 화장을 고치고 있다
그 옆에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문자를 날린다
잠시 피곤한 눈을 감으면
귀에 익숙한 카페스 선율 소리가 들려오고
지하철은 또 다른 기적을 연출한다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짚으며 구걸하던 맹인디
다음 역에서 내리자마자
지팡이를 접고는
씩 웃으며 보란 듯이 눈을 번쩍 뜬다
그가 지나가면 이제 내가 내릴 역이다
나는 미로와 같은 도시의 내장을
떠밀리듯 밀려 나와 커다란 빌딩 앞을 지난다
이 빌딩 한쪽에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입점 철회"를 외치는 시장상인들의 천막이 있고
그 반대편엔 "우리도 먹고 살자"는
입주상인들과 동네 주민들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 사이를 조심조심 지나
나는 변증법과도 같은 도시의 미로 속으로 사라진다
2
퇴근길의 지하철은 냄새로 가득하다
이 남자가. 아니 이 여자가
무슨 술을 먹었는지
무슨 안주를 먹었는지 순식간에 알 수 있다
아, 독한 생마늘 냄새, 그리고 담배 냄새,
여자들 화장품 냄새, 아저씨들 땀 냄새,
노이들 쇠한 냄새, 갑자기
휴대폰에 소리를 꽥꽥 지르는 사람,
주위와는 상관 없다는 듯 게임에 몰두하는 엄지족들,
피곤해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귀에 이어폰 끼고 야구 보는 사람들,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꼭 입구에 서 있는 사람들
만물이 살아 숨쉬는 이 공간 속에서도
기적은 당연히 쉬지 않고 일어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익숙한 카세트 음악이 들려오고
온몸에 검은 고무 옷 같은 것을 걸친 장애자가
도다리처럼 고통스럽게 바닥을 기어간다.
그가 밀고 가는 돈통은 육체의 학대를 통해
결코 정신의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부처의 가르침인 듯
몇 장의 지폐가 소복이 쌓여 있다.
얼마 전 과일이나 담을 법한 이 돈통을
누군가 들고 달아나자
그는 언제 바닥을 기었느냐는 듯
벌떡 일어나 쫓아가 잡고는
미친 듯이 주먹을 날리며
무섭게 세상을 일갈하는 것이었다.
“너, 임마, 인생 똑바로 살아”
이 엄청난 기적 앞에서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저 휴대폰의 좁은 화면만 들여다볼 뿐
도대체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백여덟 가지 방법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어쩌면 나도 머지않아 저보다 더한
기적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살기 위해서 지하철을 탄다
하루에 두 번씩.
어제도 탔고,
오늘도 탔고,
내일도 탈 것이다
지하철이 멈추면
내 삶도 멈출 것이다, 아마
원구식, 지하철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