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칼 / 정호승

난자기 2017. 8. 8. 13:11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칼 / 정호승-



공자는 '삼십에 입(立)'하라고 했습니다. 뜻을 세우라고 했지요
우리시대에는  뜻을 세우는게 아니라 칼을 세우지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빠른승진 내지는 철밥통 직장
좋은 집과 좋은 자동차와 좋은 옷과 음식에 기꺼이 절합니다
뜻은 간대없고 창과 칼만 갈고 닦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창과 칼끝이 꼳세워진 전쟁터 같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십에 불혹(不惑)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유혹(誘惑)합니다.

저기 있는 마시멜로를 누가 가져가기전에 얼른 집어 삼키라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십에 (知天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역천명(逆天命)하다가

이내 방전되기도 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도 30년동안 갈아온 무더진 칼이 있습니다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갑니다
칼을 버리지 않으면 다른 칼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거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어서였지요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칼만 갈아왔던 세월들이 불꽃놀이의 불꽃처럼 허무합니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칼이 이렇게 비웃습니다

"너 그동안 나를 떠받들고 사느라고 애썼어!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가 자꾸만 애지중지 해주니까 나도 우쭐해져서 상전노릇 좀 했지

이제 내가 너로 인해 버려져도 별 미련이 없어

그동안 고마웠어! 멍충아"


칼을 버려렵니다

칼춤을 한바탕 추고 잘 놓아지지 않는

칼을 강물로 던지려합니다

그 부드러워진 칼을 먹고 물고기들의 뜨거운 산란을

지켜보는것으로 위안 삼으려 합니다 


-백난작-



-산란하는 모습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