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 허수경

난자기 2018. 10. 5. 16:22

새싹은
어린 새의 부리처럼 보였다
지난 초봄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왔다
억겁 동안 새들과 여행하면서
씨앗은 새똥을 닮아갔다
새똥도 씨앗을 닮아갔다
붉어져 술을 머금은
겨울 열매를 쪼면서
아직, 이라는 시간 속에 걸린 잎사귀를 보면서
문득,
새들은 제 깃털을
잎사귀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일이 억겁의 어디쯤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얼음 눈빛으로 하얗게 뜨겁던
겨울 숲을 걷던 어느 날
그 열매의 이름을
문득,
알고 싶었다
새들이 잎사귀를 아리게 쪼다가
잎사귀 모양을 한 깃털을 떨구고 날아간 문득,
숱이 두터운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
날개의 탄생을 붉게 알려준
그 나무 열매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ㅡ허수경, 문득ㅡ



독일에서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허수경 시인이 지난 3일 세상을 떠났다. 54세.

경남 진주 출신인 고인은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상경해 방송국 스크립터 등으로 일하다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가는 먼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등이 있으며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등을 썼다.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등과 다수의 번역서를 펴내기도 했다. 고인은 1992년 돌연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에서 고대근동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인 지도교수와 결혼해 정착한 뒤 지금까지 독일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다. 지난 8월에는 ‘길모퉁이의 중국식당’(2003)의 개정판인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를 펴냈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005027019&wlog_tag3=naver#csidx0174dbcc10c186f9069b516eacf9c1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