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 / 손순미 본문
그 집은 담벼락 속에 들어가 있다
햇볕이 아무렇게나 흘러 다니는,
담쟁이덩굴이 꽃처럼 피어있는 담벼락을 열어보면
허물어진 집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담벼락 속으로 집이 도망치던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집의 내력은 보이지 않고 집이 서 있던 자리,
시퍼런 잡초와 썩어 나동그라진 기둥들
서로의 뼈를 만지며 세월을 굴린다
추억은 남아있을까
항아리를 들여다보면 구름이 누렇게 익어가고
세상은 집이 삭아가는 것을 방관한다
벽 속의 집은 봉긋하게 솟아난다
마당을 건너가는 풍금소리
몸을 찢어 잎을 내보내는 나무들
투명하게 널려 있는 빨래들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친 두레박이
집 한 채를 다 씻어내는,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한다
- 손순미,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 -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한다"
집은 담쟁이덩굴 속에 갇혀 있다.
고집이 센 덩굴은 스스로 손을 풀지 않는다.
덩굴은 담벼락을 옥죄며 더 깊이 뿌리를 묻는다.
나는 그때 그 담쟁이 속에 갇혀 있었다.
담쟁이는 날로 그늘을 넓히고 오래된 몸은 자주 삐걱거렸다.
낙심이란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바닥을 친 마음은 좀처럼 일어설 수 없었다.
나를 포기하고 나니 어느 날 그늘이 되어 있었다.
하릴없이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 가는 그때 이 詩句가 내게 왔다.
벽을 부수고 나오라고 했다.
덩굴을 걷어내는 일은 벽을 부수는 일,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나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를 붙잡고 늘어지던 덩굴손의 마디가 툭툭 끊어지고 벽 속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났다.
나는 오랫동안 나에게 갇혀 있었다.
- 마경덕 (시인)
109명의 시인이 뽑은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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