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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여보세요 나예요 내 모습이 여간 이쁘지 않나요 이쁘다고 말해주세요 기분나쁜 일이 있어도 나를 보고 이쁘다고 말해주세요 나의 사연에 대해 말하자면 길어요 당신의 일과 비슷하니까 생략하께요 대신 빛이 머무는 것과 같이 시선을 내게 묻어보세요 당신에게 웃고있는 내가 보이나요 나는 빛의 마술사, 붉은 스커트를 입고 보라색 입술로 춤추는 신데렐라 자정까지만 볼 수 있지요 장미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유혹하는 시간은 빅밴의 시간 나머지는 시간밖의 시간 나는 영원히 지지않는 불멸의 옷을 입고 시간밖에서 당신을 보며 웃고 있을 거예요 나는 빛의 마술사, 당신은 나의 수 많은 애인들 중 하나 당신의 변치않는 사랑을 치하합니다 투정하지 마세요 모든 애인에게 똑같이 키스해 주니까요 - 장미정원, 백난작 -
흰 여백에 검은 길들이 열병식처럼 도열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소총을 들었다 길을 걸는 일만 남았다 눈을 감아야 걸을수 있는 길 같이 걸을 수 없는 길 희망의 길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길 끝인가 싶었는데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불멸의 바로 그 길 소총을 나에게 겨누어야 했다 나를 쏘아야 갈수 있는 길이다 자살은 언제나 실패했고 매 번 빈 총을 들고 전사했다 지상(紙上)작전 / 백난작
노을빛 드리운 강가 가마우지 홀로 서성이다 물속 가만히 머리를 넣고 노을을 뒤척여 해를 낚아 삼켰다 뱃속에서 해가 서성이자 새는 덩달아 서성였고 서쪽 빈 하늘까지 새의 소리가 들렸다 해가 사라진 하늘은 노란 달을 두개나 낳았고 검은 숲 속에서 서성이던 굶주린 남자가 달 하나를 집어 먹었다 뱃속에서 달이 서성이자 그는 달을 보며 다시 서성였고 밤이 새도록 서성임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더 서성여야 겨울이 올까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면 자작나무 흰 가지위에서 눈처럼 포근히 잠들수 있을텐데 그러므로 바람의 서성임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은 또 서성일테니 잠든후에도 이 서성임은 멈추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햄릿과 자작나무 / 백난작
나무에게 바란다 부디 길들여지지 않기를 너의 강건한 뿌리를 보았다 곧게 뻗은 가지와 그 위로 무성한 잎들의 자유를 보았다 지상의 오직 한 곳 누군가 정해준 그 땅에서 생장과 소멸의 생을 바랬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누군가의 꿈을 쫒아 팔다리 다 잘린채 팍팍한 새 땅에 서 있느냐 참담하다 자유여 암울하다 이끌린 생이여 혁명은 늘 불발이다 그 누군가의 손짓에 높새바람도 간밤에 떨었을 것이다 나무에게 바란다 서서 오래 버티기를 찢긴 뿌리 곧게 펴고 서서 흔들리는 붉은 산이 되기를 나무에게 / 백난작
저기가 자정이다기억과 기억이 하나로 합쳐져바다가 되는 시간 곧 동녘의 눈시울은 붉어 질 것이다기억의 벽이 허물어지고정체를 알수 없는 사람이문밖에 서 있다알 수 없는 공간에서이미 지워진 사람이 들꽃처럼 서 있다주름진 눈가에
내 속에도 잠든 우라늄이 있다원자번호 92번 몸 안에서 핵분열이 시작되었다결코 꺼지는 법이 없는 끝내는소멸할 뿐인U 거울을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다꺼지지 않는 불꽃잠들지 않는 우라늄 U형태가 바뀔 뿐나는 충직한 하인 우라질

시간을 미분해 보았다 '먹고', '자고', '싸고'만 남았다 먹고, 자고, 싸고는 함수 f(x) ='먹고', '자고', '싸고'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벗어나고 싶다면 엄청난 속도의 비행기에 올라타야 하는데 시간을 부수어 재가 될 때까지 활활 태워야 할 것이다

네 머리속에 무엇이 기어 다니는 거니? 많이 아픈 거니? 늑대처럼 짖지마 나도 아파 쓰레기를 가득 안고 살지 비워도 비워도 다시 차오르는 찌거기가 주인인양 온 몸을 돌고 있어 내안에 사는 다른 내가 나를 기둥에 꽁꽁 묶어 두었어 어떤 나를 원하는 거지 나도 내가 낮설기만 해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거 알아 나에게 너도 마찬가지야 우린 너무 꽉 차 있어서 서로를 붙들 수 없어 바람이라도 되어 볼까 늘 빈 곳을 찾는 이방인의 푸른 눈빛 같은 바람 마음 한 구석을 비워주면 나의 이방인이 되어 주겠니 그러면 나도 너의 타인이 될 수 있을런지 몰라 네 머리속에 무엇이 기어 다니는 거니? 많이 아픈 거니? 늑대처럼 짖지마 나도 아파 우리는 늦은 항문기를 지나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