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 (920)
오자기일기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깔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ㅡ정끝별, 상강ㅡ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해안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내게 病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새들이 지저귀어 나무 전체가 소리를 내고 덮거나 씻어내려 하는 것들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어느 한 고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네 나 다시 잠이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전율을 가르며 갈기털이 다 빠져나가도록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정적만 남을 때까지 ㅡ박주택, ..
그대를 골목 끝 어둠속으로 보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롭지 못한 만큼을 걷다가 기쁘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울다가 슬프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취하여 흔들거리며 가는 김포행 막차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멀리 비행장 수은등만이 벌판 바람을 몰고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 훗날 아직도 그대 진정 사람이 그리웁거든 어둠 속 벌판을 달리는 김포행 막차의 운전수 양반 흔들리는 뒷모습을 생각하라고. ㅡ박철, 김포행 막차ㅡ
바위가 그물을 입었다 호박 덩굴이 걸려든다 덩굴이 걸려들자 간지러워 못 참겠다는 듯 노란 호박꽃들 다투어 핀다 꿈속 피붙이 만나듯 그 길로 산책 나간다 원고지 같은 그물 입고 있는 바위에 걸려든 것 그물을 잡고 기어오르는 덩굴손에 걸려든 것 귀청을 찢는 매미 울음 멎고 매미들 다 어디 갔나 궁금할 즈음 덩굴손 한창일 땐 보이지 않던 가파른 벼랑 끝 칸과 칸 사이 커다란 적멸보궁 한 채 붕붕거리는 입들이 드나들던 꽃 한 송이 적멸보궁이 될 때까지 바위의 정수리는 또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무수한 내일의 꽃들 펼쳐질 수많은 웃음과 염원들 절벽 위에 있다 ㅡ박홍점, 영랑호에서ㅡ
형님은 뜨거움을 강조하지 않으셨다 불볕 속을 견디고 견디어 가장 나중까지 남은 빛 하얀 소금을 만지시며 곰섬의 그 흔하디 흔한 바닷물 앞에서 땀과 갈망의 그 중 무거운 것을 안으로 눅이어 빛나게 달구어진 살갗으로 물들이 탔을 때 그것들을 한 그릇씩 자루에 담아 이웃의 식탁에 조금씩 나누며 기뻐하셨다 가장 뜨거운 햇살 또 시간을 지나 우리의 허영과 거짓들이 모두 비늘을 털고 날려간 뒤 비로소 양식이 되는 까닭을 알고 계셨다 육중한 짐자전거 바퀴 위에서 튼튼히 삶을 궁글리며 형님은 한 번도 뜨거움이라 강조하지 않으셨다 ㅡ도종환, 소금 ㅡ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ㅡ신경림, 농무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