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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ㅡ문정희, 돌아가는 길ㅡ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 없는 몸뚱이로 팔려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나, 관객이 있다 幻으로 배 불러오는 욕정 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幻인 줄 알면서 나는 幻에 취해 실감나게 펼쳐지는 幻을 끝까지 본다 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 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ㅡ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
배흘림기둥같이 묵직한 가죽 자루 더 이상 금싸라기도 담을 곳이 없다 그칠 줄 모르고 삼켰던 음식물 다 토해낸다면 커다란 거품 산이 될 것이다 오물덩이 산을 베개로 하고 거품에 취해 가끔 산 아래로 미끄러지기도 하는 심심한 해골통 화분에다 하늘거리는 양귀비꽃이나 하나 이쁘게 기르고 싶다 청명하게 바람 부는 날은 만리 하늘을 날아오르다가 지전처럼 바람난 꽃가루 지상에 뿌리고 향기로운 흙가슴 열어 먹었던 음식물 하늘을 향한 제단처럼 쌓아놓고 허망하게 무너지는 물 흙냄새 풍기는 연꽃 하나 피우고 싶다 ㅡ최동호, 해골통 화분ㅡ
밤새도록 당신을 들락거리는 생각들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 생각들 당신의 천장을 쿵쿵거리는 생각들 당신을 미치게 하는 생각들 미쳐가는 당신을 조롱하는 생각들 당신을 침대에서 벌떡 일으키는 생각들 당신을 鼓舞시키는 생각들 순식간에 당신의 고무를 무화시키는 생각들 당신을 돌처럼 굳어가게 하는 생각들 당신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생각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무덤으로 만드는 생각들 무덤 속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손톱을 자라게 하는 생각들 죽어도 죽지 않는 생각들 관 속의 뼈들을 달그락거리게 하는 생각들 무덤이 파헤쳐지고 장대비가 쏟아져도 백 년 이백 년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생각들 당신의 텅 빈 해골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가차 없는 생각들 ㅡ황병승, 생각들ㅡ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본다 ㅡ임영조, 삼월ㅡ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그늘에 잠시 기대앉았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깔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이 화엄으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ㅡ정끝별, 상강ㅡ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