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길이 없는 길 위에서 / 김승희 본문
역촌동→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버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객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 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 가는
가을 바람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
조각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 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같이 멀미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ㅡ김승희,
길이 없는 길 위에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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