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변기나 깡통’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본문
‘변기나 깡통’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마르셀 뒤샹, 「샘(Fontaine)」, 1917. 뒤샹은 남자 소변기에 어떤 가공도 하지 않은 이 작품을 뉴욕 그랜드 센트럴 갤러리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해 논란을 일으켰다.
남성용 변기 ‘샘’은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었는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적’인 것은 어떤 것이고, ‘예술작품’의 특성은 무엇인가? 예술사의 전개 과정을 볼 때, 특히 20세기 이후의 예술사는 이 물음들에 대하여 드라마틱하면서도 재미있는 답변을 준다. 20세기 미술에 돌연변이와 같은 충격을 준 인물로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이 있다.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1887~1968)은 레디메이드(ready made, 기성제품)라는 새로운 미술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평면적인 캔버스 위에 대상을 재현하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제품에 사인만 해도 예술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기존의 예술 관념에 대한 도전이자, 관습적 예술 언어에 대한 위협이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또한 반예술(anti-art)로서 기존 예술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기도 했다.
1917년 뒤샹이 예술작품으로 들고 나온 남성용 변기 ‘샘(Fontaine)’은 예술이 단지 ‘미메시스1)’가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과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뒤흔든 것이다. 뒤샹의 의도는 자본주의 대량생산 시대의 미학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앤디 워홀
한편 1964년에 앤디 워홀(1928~1987)은 길 건너 슈퍼마켓에서 빈 상자를 주워다 목수로 하여금 수백 개의 똑같은 나무상자를 만들게 했다. 워홀은 이것들에 실크스크린으로 상표를 제작하여 붙인 다음 뉴욕의 화랑에 예술작품이라고 전시했다. 이 전시회를 관람한 예술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1924~2013)는 ‘예술의 종말’을 고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미술작품은 언제나 ‘작품’으로 확인 가능하다는 암묵적 인정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 와서는 왜 그것이 ‘예술작품’이 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철학적 질문이 주어지게 되었다. ‘예술작품’과 ‘일반사물’ 간에 전혀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데 왜 어떤 것은 예술이 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한가? 똑같은 ‘변기’와 ‘깡통’인데 어떤 것은 예술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단 말인가? ‘예술성’과 ‘미’의 차이를 무엇으로 나눈단 말인가? 과연 진짜 예술은 무엇이고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이번 장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현대 예술의 과제, “그것은 왜 예술이 되는가?”
남성용 변기 ‘샘’으로 미술사에 극단적인 충격을 준 프랑스의 전위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1887년에 태어났다. 뒤샹이 살던 때는 시민혁명으로 근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생산체제의 변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역사적 용광로의 시기였다. 공장제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과학의 발전하에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역사적 변화의 시대 한복판에서 마르셀 뒤샹은 세상과 그 세상을 표현하는 예술에 새롭게 눈을 뜬 것이다.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 1913.
뒤샹도 초기에는 순수미술로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다 1912년 미국의 항공 박람회에 참석하여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때 그가 친구에게 한 말은 이렇다.
“이제 그림 따위는 망했어! 누가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만들 수 있겠어?”
그리고 1년 후인 1913년 뒤샹은 희한한 작품 하나를 창작한다.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뒤집어 달아놓은, 기존의 미술 관념으로 보면 기괴한 작품이었다. 이것이 뒤샹이 기성품을 이용해 만든 첫 작품이다.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깨고, 당시까지 미술의 재료로는 상상하기 힘든 물건을 가져다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뒤샹으로 인해 20세기의 미술 감상자들은 눈앞의 작품뿐 아니라 뒤에 숨은 작가의 정신까지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졌다. 오늘날 현대미술이 점점 난해해져 미술 감상의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1917년 뒤샹은 변기에 어떤 손질도 하지 않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작품으로 내놓는다. 이 사건은 미술계에 큰 충격과 혼돈을 몰고 온다.
백남준, 「다다익선」, 1988. <출처: (cc) 최광모 at Wikimedia.org>
“과연 미술작품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작품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어 예술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시장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옴으로써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곧 기존 예술 관념에 대한 파괴이자 혁신이 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말 인상파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뒤샹의 <샘(1917)>과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 그 뒤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넝마 같은 옷’을 예술작품으로 들고 나오는 것까지 이어진다.
이제는 그 정체를 규정할 수조차 없고 보기에도 끔찍한 ‘구겨진 쇳덩어리’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술작품이라며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재현’ 혹은 ‘표현’이나 ‘아름다움’과 동일시되었던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이 산산이 박살 나버린 것이다.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 중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술’이란 개념의 규정이다. 개념 규정은 곧 철학적 활동의 핵심기능이다. 예술의 철학적 규정,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전제하지 않고는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겉돌 뿐이다. 다른 종류의 인식 대상도 마찬가지지만, 예술의 경우도 의미 있는 담론은 개념 규정에서 시작해 개념 규정에서 끝난다.
예술의 종말과 새로운 현대예술의 시작
라스코 동굴 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베르제 강변에 있는 라스코 동굴로 탐사를 갔던 네 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B.C. 15,000년~B.C. 13,00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아서 단토는 예술시대(Era of Art)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의 예술을 다음과 같이 통시적으로 구분한다.
1)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원시시대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중반에 해당되는 15세기까지의 작품 - ‘예술시대 이전의 예술’2)
2) 20세기 초 마네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인 1964년 워홀의 작품이 뉴욕의 한 화랑에 전시될 때까지 지속된 모더니즘 운동 기간의 작품 - ‘예술시대의 예술’
3) 그리고 워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으로 생산된 다양한 예술작품 - ‘예술시대 이후의 예술’
이 세 시기의 특징을 예술 개념의 존재 여부와 관련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시기의 예술은 자신을 다른 사물들과 구별하는 근거로서의 예술의 개념이나 본질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시기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깨어나서 예술이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을 찾는 데 쏟은 노력의 시기였다는 특성이 있다.
세 번째 시기는 예술이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역사적 고정관념과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이른바 다원적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 그 특성이 존재한다.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바로 두 번째 시기, 즉 예술시대의 종말을 지칭하며 이때의 예술은 예술사와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 예술의 역사는 오로지 ‘예술 시대’에 한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예술의 존재론적 속성과 기능에 대한 의식이 생기고, 그것이 순수예술(fine art)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다른 여러 가지 기술들(arts)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을 만듦으로써 그 전후 두 시기와의 차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앤디 워홀, 「브릴로 상자」, 1964.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고하고 나서, 이제 현대미술은 왜 그것이 예술작품이 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새로운 철학적 과제가 생겨났다. 단토가 앤디 워홀의 전시에서 목격한 <브릴로 상자>는 일반 사물과 시각적으로 다른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술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단토에 따르면 워홀에 이르러 현대미술을 미술로 만들어 주는 데 시각적인 요소가 관여하는 바가 전혀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눈만 갖고서는 예술작품과 일반사물 사이의 차이가 밝혀지지 않는다.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감각 경험으로부터 사유로 전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철학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 규정은 철학적 활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철학적 규정,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전제하지 않고는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겉돌 뿐이다. 이제는 전통적인 예술을 넘어 워홀의 작품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 작품을 포괄적으로 묶어 설명할 수 있는 예술의 새로운 개념 규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는 객관적 속성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과 비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칸트의 인식론에서처럼 명제의 진위 판단 개념에 비추어서만 구별할 수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통신 박물관 앞에 세워진 백남준의 작품 <출처: (cc) Fb78 at Wikimedia.org>
칸트에 의하면 명제의 진위를 판단하는 양상은 단언적, 필연적, 개연적인 세 가지로 구별된다. 그중 단언적, 필연적 양상을 가지는 것들이 진리를 주장하는 반면, 개연적 양상을 가지는 명제는 진리의 ‘가능성’만을 제안할 뿐이다. 따라서 개연적 양상을 가지는 명제의 진위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어떤 명제가 예술작품이냐 아니냐를 물리적으로 보아서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 명제를 양상적 관점에서 검토할 때 예술적 명제인지 비예술적 명제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 한 명제를 예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개연적 양상으로 봄을 의미하며, 똑같은 명제를 비예술작품으로 대한다는 것은 단언적 혹은 필연적 양상으로 대함을 의미한다. 한편 언어적 담론으로서의 예술작품과 철학·과학·역사·종교 등과의 구별은 오로지 그것들 각각의 존재 양상 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후자가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사실성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전자(예술적 명제)는 그러한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가능성을 제안한다. 진리라는 개념은 제안이 아니라 주장에만 적용될 수 있는 만큼 예술작품, 즉 예술적 명제의 진위를 따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이카루스의 운명을 타고났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종전의 것과는 다른 새롭고 독창적인 시각이다. 그것은 새로운 언어의 발명, 새로운 언어적 패러다임, 새로운 개념적 지도의 발명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언어적 발명 없이는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근원적 기능은 독창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언어적 패러다임을 발명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유입은 기존 패러다임의 대체와 전환을 의미한다. 그래서 새로운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옛 예술작품들의 재검토와 비평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소한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이 없는, 새로운 언어적 명제가 아닌 예술작품은 전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 예술이 존재론적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근본 조건은 사실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최소한 신선하고 독창적이며 유일한 언어의 개념적 형식을 갖추는 데 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날개가 타버려 추락하는 이카루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6.
예술적 충동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물의 궁극적 진리,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려는 인지적 소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언어의 재현 없이는 어떤 진리의 포착도 가능하지 않다. 한편 언어로 재현된 사실은 필연적으로 애초에 재현하고자 한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새롭고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Icarus)의 시도처럼 부질없다.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날개가 타버려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카루스처럼, 예술가가 자신의 표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표상활동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그것이 예술이기에 새롭고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의 사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언어적 명제로서의 예술작품은 자신의 것을 포함한 기존의 언어에 대한 비평의 표시이며, 끝없는 언어적 개성을 위한 창조적 활동에서만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예술은 본성상 자기해체적, 즉 파괴적이며, 영원한 자기해체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뜻에서 ‘아방가르드3)’라고 불리는 특정한 예술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이다. 예술은 영원한 혁명의 양식 말고는 달리 존재할 수 없다. 혁명적이 아닌 예술작품이란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적이다.
마드리드의 아방가르드 모임에 참여했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1931)>
때문에 근대 예술사의 자기해체적 성격은 파괴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구성적이며, 이러한 과정은 슬픈 소멸과 종말이 아니라 예술의 새로운 시작과 재생의 신명 나는 표현이다.
21세기의 초엽인 현재, 예술의 고전적 개념은 곧 사망할 터인데, 그것은 사라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넓고 근원적인 뜻으로 새롭게 탄생하기 위해서다. 예술은 언제나 신선한 방식으로 언어적·개념적 렌즈를 발명해, 가능하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참신하게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가 보다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형태로 재구성하려 할 것이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은 새로운 문명 탄생의 징조가 될 것이다
아름다운 ‘재현’으로서의 예술이 부정되고, 일상 사물인 ‘변기’와 ‘깡통’이 예술이 되는 극적인 변화는 예술사 전체를 관통해온 기존 예술의 ‘해체과정’을 확연히 보여준다. 그러나 계속적인 해체과정은 세계 전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적으로 통합하는 지속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예술사가 보여준 자기해체적 측면은 미학적·예술적·기술적, 나아가 문화적·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서양예술의 자기해체는 시효를 다해가는 문명의 석양이 아니라 새로운 먼동을 알리는 징조로 풀이될 수 있다.
우리는 개념적 렌즈를 통해서 세계를 관찰하고 구성하는데, 그러한 개념적 렌즈는 인간이 자연계에 적응하며 살기 위해서 고안해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적·문화적·지리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필요와 목적을 갖고 살아가므로, 개념의 체계와 사물들을 보고 조직하는 방식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가변적이다.
서양에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세계를 지배해온 과학기술 문명의 몰락 가능성은 생활환경의 악화, 생태계 파괴, 그리고 끊임없이 깊어지는 사회 병폐와 도덕적 타락 등에 의해서 점차 자명해졌다. 이런 부정적 현상들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에 의해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 같은 위기의 원천이 다름 아닌 서양식 합리주의와 이원론, 그리고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서구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세계의 재개념화, 즉 급진적으로 색다른 철학적 재구성 없이는 우리가 직면한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계예술사 전체를 통해서, 특히 현재의 서양예술사를 통해서 드러난 예술의 자기해체적 특징은 시효를 다해 가는 문명의 석양이 아니라 새로운 먼동을 알리는 징조로 풀이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내재하여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술의 자기갱신적 특징이야말로 세계를 새로 조직하기 위한 최선의 패러다임이며, 우리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공헌하게 될 것이다.
미메시스(mimesis)재현이나 모방을 의미한다.
예술시대 이전의 예술15세기부터 1900년까지도 예술시대에 속하지만, 모방, 재현에 집중한 시대라서 단토는 그 이후의 시대와 다시 구분하고 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예술. 기존의 예술이 갖는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개념을 예술에 도입한 활동을 전반적으로 일컫는다. 특별히 아방가르드 미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말한다.
주석
1. 미메시스(mimesis)재현이나 모방을 의미한다.
2. 예술시대 이전의 예술15세기부터 1900년까지도 예술시대에 속하지만, 모방, 재현에 집중한 시대라서 단토는 그 이후의 시대와 다시 구분하고 있다.
3.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예술. 기존의 예술이 갖는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개념을 예술에 도입한 활동을 전반적으로 일컫는다. 특별히 아방가르드 미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말한다.
박이문 인문학 읽기 2016.02.26 책보러가기
한국 최고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박이문 선생의 저서 『박이문 인문학 전집』은 오롯이 ‘지적 여정을 통한 진리 탐구’라는 한길만을 걸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쌓아올린 그의 위대한 발걸음 그 자체다. 또 진리에 대한 사랑과 지혜가 매우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글 박이문 작가, 문학 박사, 철학 박사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로 떠나 문학 박사학위,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시몬스대학교, 포항공과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예술, 과학, 동양사상 등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선구자적인 인문학자로 살았다. 시를 쓰는 창작도 일생 동안 지속하여 어린 시절의 꿈대로 시인이자 작가이며 철학자인 인문학자로서 아름다운 ‘사유의 둥지’를 완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기나 깡통’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 ③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 (박이문 인문학 읽기, 2016.02.26, 박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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