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아름답고 높은차원의 욕망, 에로스 본문
플라톤은 서양철학, 더 나아가 서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그의 욕망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의 욕망 이야기는 <향연>, <파이드로스>, <파이돈>, <국가> 등에 주로 나온다. 모두 그의 중기에 속하는 작품들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물론 자신의 사상도 풀어놓았다.
특히 그는 혼의 정화를 위해서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들에서 비록 욕망이 다루어지긴 하지만, 주연은 욕망이 아니라 이성(logos)이나 지성(nous)이다. <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을 중심으로 플라톤의 욕망 이야기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죽은 듯이 살아라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뒤 독배를 마시고 죽는 날에 친구,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묘사한 작품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 철학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기꺼이 죽기를 바란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우선 서두에서 논란거리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이 주장은 그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죽음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세속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 성적인 쾌락, 멋진 옷이나 장신구를 착용하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즐거움이나 쾌락은 몸과 몸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세속적 행복을 위해서 영혼보다 몸과 몸의 욕망을 중시하고 돌본다. 이처럼 몸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죽음을 꺼리고 삶을 지속시키려 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몸의 욕망은 물론 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을 멀리하고 꺼린다. 왜 그럴까? 지혜는 순수한 혼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몸에 갇혀 있는 혼은 순수할 수 없다. 시각과 청각 같은 몸의 감각은 혼을 불순하게 만들고 혼의 인식을 방해한다. 게다가 전쟁과 불화, 싸움의 원인이기도 한 몸의 욕망과 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은 혼을 혼란 속으로 빠뜨려 혼의 순수한 인식을 좌절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혼은 몸과 몸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정화되어야 비로소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혼은 지혜를 획득하여 이데아(idea, 존재의 참모습), 형상(eidos)을 순수하게 직관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는 몸을 돌보는 대신 혼을 돌보아야 한다. 그래서 혼이 몸의 영향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도록 하는 수련을 살아 있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몸과 몸의 욕망에 필요한 재물이나 명예 등을 초개와 같이 여길 뿐만 아니라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성적 쾌락 등을 멀리해야 한다. 요컨대, 그는 혼의 힘인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죽은 듯이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죽음은 바로 혼과 몸의 분리이므로 혼이 몸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처럼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금욕주의를 설파하지만 이성과 욕망의 갈등은 아직 다루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갈등 구도는 <파이드로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제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혼의 신화를 살펴보자.
검은 말을 제압하라!
<파이드로스>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젊은 제자인 파이드로스가 에로스와 수사학에 관해 나눈 대화를 묘사한 작품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수사학이 아닌 에로스다. 에로스에 관한 논의에서 욕망이 강렬하게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eros)는 일종의 욕망이긴 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의 쾌락을 누리려는 욕망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랑(love)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상당히 유사하다. 그런데 우리가 욕망과 사랑을 구분하듯이, 플라톤은 에로스를 욕망(epithymia)의 일종으로 보면서도 욕망과 구분했다. 에로스가 혼의 날개를 돋우고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천상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도록 이끄는 데 반해, 욕망은 성적 쾌락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에서 혼은 두 필의 말이 끌고 한 명의 마부가 모는 마차에 비견된다. 천상에서의 혼은 날개가 있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다 혼의 힘이 약해지면 지상으로 떨어져 혼은 몸에 갇히고 혼과 몸이 하나가 된다.
이 지상의 혼도 세 부분, 즉 두 필의 말과 한 명의 마부로 나뉜다. 마부는 이성에 해당하고 두 필의 말 가운데 흰 말은 기개, 검은 말은 욕망에 해당한다. <국가>에서처럼 <파이드로스>에서도 플라톤은 혼을 이성, 기개, 욕망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검은색은 서양에서 욕망을 상징하는 색인데, 이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흰 말은 준수하게 생긴 유순한 말이기 때문에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말을 잘 듣는다. 반면에 검은 말은 꾀죄죄한 생김새에 못되고 제멋대로 날뛰는데다, 마부의 말을 잘 따르지 않고 대든다. 마부가 채찍과 가시 막대기를 들어야 겨우 고분고분해진다.
지상의 혼이 언젠가 연인(미소년)1)을 보고 몸이 후끈 달아올라 가까이 다가서려 하다가 마부가 이 연인의 얼굴에서 천상의 아름다움을 얼핏 보고 움찔하며 고삐를 뒤로 잡아당긴다. 흰 말은 순순히 따르지만 검은 말이 발버둥치면서 욕하고 투덜대자 마부는 마지못해 이 연인에게 다시 다가서는데, 말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마부는 곤란에 빠진다. 그제야 그는 이 못된 말의 재갈을 잡아당겨 주둥이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채찍과 가시 막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쳐 여러 차례 이 말을 주저앉혀 간신히 제어하게 된다. 검은 말은 거칠어서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결국 마부의 채찍에 굴복하고 만다.
혼의 신화에 나오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천상의 아름다움(이데아의 세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이성이 욕망을 제어해야 하는데, 힘들긴 하지만 결국 제어할 수 있음을 이 신화는 비유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에로스는 지혜 사랑의 출발점
<파이드로스>의 에로스 찬양은 <향연>에서 더욱 농도가 짙어진다. <향연>은 아가톤이 베푼 향연에 참가한 아리스토파네스, 파이드로스, 소크라테스 등이 에로스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남녀양성 설화와 같은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소크라테스의 에로스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향연>에서도 <파이드로스>와 마찬가지로 에로스(eros)와 욕망(epithymia)이 구분된다. 에로스는 방종에 흐르기 쉬운 욕망과 달리 절제를 따르기 때문에 욕망보다 강하다. 욕망은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지만, 에로스는 오히려 욕망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찬양의 대상이 된다. 지혜를 사랑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 설화를 들려준 무녀 디오티마에 따르면 에로스는 방도(方道)의 신인 포로스와 곤궁의 신인 페니아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를 닮아서 못생기고 궁핍한 생활을 하지만 아버지를 닮아서 계책을 꾸미는 데 능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을, 지혜롭지 않지만 지혜를 늘 사랑하고 추구한다. 그에게 결핍된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므로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에로스의 의미를 욕망과 결부시켜 규정해보자. 욕망(epithymia)이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려는 정념이라면 에로스(eros)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아름다움을 제 것으로 만들려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로스는 사멸할 수밖에 없는 몸의 차원으로부터 불멸의 영혼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5단계를 거쳐 상승한다. 에로스에 빠진 자는 처음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몸을 사랑하다가 모든 몸들에 속하는 아름다움이 같은 것임을 깨닫고 모든 아름다운 몸을 사랑한다. 그 다음에 그는 몸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올라가서 아름다운 행실을 사랑하고 여러 아름다운 행실들로부터 단일한 앎인 아름다운 배움으로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그는 본성상 아름다운 것인 아름다움 자체, 즉 아름다움의 형상에 도달한다.
이 5단계를 디오티마는 에로스의 사다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에로스의 사다리는 점진적으로 상승하며, 건너뛰어 넘어갈 수 없다. 이 사다리는 몸의 욕망으로부터 혼이 정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맨 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움 자체의 직관은 혼이 이성적으로 정화되어 순수해졌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에로스의 사다리는 몸과 영혼의 위계질서를 세울 뿐만 아니라 욕망 자체의 형이상학적 위계질서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금욕주의와 함께 오랫동안 서양문화를 지배해 왔다.
매슬로(Abraham Maslow, 1908~1970)가 20세기 중반에 <동기와 성격>에서 제시한 욕구 5단계 학설은 오늘날에도 교육, 경영 등 여러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플라톤의 <향연>은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 욕구 5단계 학설도 에로스의 사다리의 현대판이 아닐까.
매슬로의 욕구 5단계에서는 욕구가 하위로부터 상위로 가지런하게 상승하며, 하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의 욕구로 올라갈 수 있다. 그의 욕구 5단계는 에로스의 사다리와 내용은 다르지만 이 사다리처럼 욕망의 위계질서를 세운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이 5단계가 경직되지 않고 예외가 있음을 인정했을 뿐이다. 도표에서 보듯이, 그는 몸과 영혼의 위계질서를 현대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철학이다. 그러나 욕망에 관한 한, 그는 이성 중심적인 금욕주의를 지향하며 욕망의 형이상학적 위계질서를 은밀하게 만들어 내었다. 그의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는 에픽테투스, 데카르트, 칸트 등으로 계승되고 발전된다.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그 당시의 희랍에서는 미소년을 향한 동성애가 성행하였다.
- 글 조홍길 부산대 ·동서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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