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동물의 왕국 중독증 / 이면우 본문
티브이모니터 속에서
사자가 사슴을 먹고 있다
바로 직전까지 도망치는
사슴을 사자가 쫓아다녔다
나는 사슴이 사자 속으로
벌겋게 들어가는 걸 본다
아니 저런, 꼭 제집 대문
들어가듯 하네 입이 문이면
송곳니는 어서 들어가자고
등 떠미는 다정한 손
아니지 지금 사슴이
사자로 변하는 중이잖아
서로 꽉 붙들렸으니
영락없는 한몸뚱어리지
그렇게 한순간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돌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핏빛
하늘 아래
사반나의 황혼 장엄하다
어린 사슴 따뜻한 사자 뱃속에
들어간 황혼을 탁 끄고
냉장고 열어 내용물 환히
비치는 유리그릇들
어둑한 식탁위에 늘어놓다가
그 차가움에 감전되듯
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힌
저녁의 정체를 비로소
등줄기로 부르르 떨었다
ㅡ이면우, 동물왕국 중독증ㅡ
자연스럽게
자연의 정첼
드러내는 저녁
시작과 끝,
한판일때 자유롭따..
소가 트림의 왕이자 이산화탄소 발생기라면
이 동물은 방귀의 왕이자 암모니아 발생기입니다
넓은 거실에 서식하면서 점점 소파를 닮아가고 있죠
중추신경은 리모컨을 거쳐 TV에 가늘게 이어져 있습니다
배꼽에 땅콩을 모아두고 하나씩 까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렇게 위장하고 있다가 늦은 밤이 되면
진짜 먹잇감을 찾아 나섭니다 치맥이라고 하죠
치맥이란 술 취한 조류인데 날지 못하는 녀석입니다
이 동물의 눈은 카멜레온처럼 서로 다른 곳을 볼 수 있죠
지금 프로야구 하이라이트와 프리미어리그를 번갈아 보며
유생 때 활발했던 손동작, 발동작을 회상하는 중입니다
(......)
동물계 척추동물문 소파과 의자속 남자 사람, 52
- 권혁웅, 동물의 왕국1 -
▶권혁웅=(1967~ )충북 충주에서 출생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가 있고, 『두근두근』,
『꼬리 치는 당신』 등의 산문집과, 『미래파』, 『입술에 묻은 이름』,
『당신을 읽는 시간』 등의 평론집과 해설집을 펴냄.
2000년 제6회 <현대시 동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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