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꿈속에서 / 서정춘 본문

꿈속에서 / 서정춘

난자기 2016. 12. 12. 11:42


시인 정지용은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로 말을 달리고
남루도 추울 것도 없는
마흔 몇 살 홀아비는
말구루마를 끌고
구례 장날을 돌아와선
오두막에 딸린
마구간을 들 때면
나는 조랑말의 차디찬
말방울 소리에 귀가 시려
잠 못 이룬
겨울밤이 있었다

ㅡ서정춘, 꿈속에서ㅡ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
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집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
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
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 발린 연필 글씨로 씌
어 있었다

 

- 서정춘 ,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



 









정지용 ‘향수’ <1927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해질 무렵)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여러 모양의 별들이 섞여 빛나는 모습)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인수 / 최첨단  (0) 2016.12.15
풍장63 / 황동규  (0) 2016.12.13
눈 / 김수영  (0) 2016.12.09
섬진강5 / 김용택  (0) 2016.12.08
풀잎 / 정진규  (0) 2016.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