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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5 / 김용택 본문

섬진강5 / 김용택

난자기 2016. 12. 8. 11:09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 가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 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버릴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눈빛 하나로
어둑거리는 강물에
가물가물 살아나
밤 깊어질수록
그리움만 남아 빛나는
별들같이 눈떠 있고,
짜내도 짜내도
기름기 하나 없는
짧은 심지 하나
강 깊은 데 박고
날릴 불티 하나 없이
새벽같이 버티는
마음 등불 몇 등같이
이 세상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새벽 강물에
눈곱을 닦으며,
우리 이렇게
그리운 눈동자로 살아
이 땅에 빚진
착한 목숨 하나로
우리 서 있을 일이다

ㅡ김용택, 섬진강5 ㅡ





흘러가는 것들이
저와 같구나
머물지 않는 강!  - 作酌-


버리고 버리고 비우고또 비우고

날릴 불티하나 없는 등불로

새벽강가에 서서

가슴 팍팍함을 흘려 보내는 착한 목숨이 부럽구나

저 무욕의 땅을 찾아가는 배야, 가는배야 !

그곳이 어드메뇨!!
나는 항상 배가고픈 살찐짐승이었다
배는 떠나고

가는 배만 말똥말똥 쳐다본다 - 白卵-





에피크루스에게 행복에 대해 물어본다


흔히들 그가 '쾌락주의'의 대표자였다는 것때문에 방탕하고 문란한 사상가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고 스토아 학파에서도 이를 빌미로

에피쿠로스를 공격했지만 이는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고통의 부재'로, 오히려 쾌락을 일부러 추구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그가 추구하라고 주장한 것 중의 하나는 '신체의 고통이 없는 상태'(aponia)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생을 유지할 정도만을 소비하는 절제가 필요하다. 또 한편으로 에피쿠로스는 망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이 정신적인 고통을 준다고 보고 우주와 고통, 욕망 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여기서 철학이 필요해진다), 이를 통해 '마음의 평안'(ataraxia)을 얻을 수가 있다고 보았다


이외에 공동체적 삶을 살면서 우애를 강조했으며(그러나 재산을 공유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노예, 여성(심지어는 창녀도) 등까지도 학파에 받아들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모든 인간이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의 최고점인 죽음이 쾌락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죽음은 그 자체로써 매우 고통스럽지만 인간이라면 결코 피할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의 부재를 추구해야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라스트보스라는 느낌이랄까.

간단한 역설로 설명한다.

요지는 "인간이 살아있다면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죽었다면 죽음을 느낄 수 없다.

고로 인간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그 마음을 던져버려라. 그렇다면 그대는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난 것이다."


-나무위키백과-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 즐거움이 있습니다."

(Stranger, here you will do well to tarry; here our highest good is pleasure.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Epicu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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