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오래된 칼 / 이향지 본문

오래된 칼 / 이향지

난자기 2017. 3. 22. 15:33




이제
제 날은
이촌도 안 남았습니다
죽은 고기들이나
썰면서
강철의 날들을
이토록 축내다니!
이제는
제 날이 저를 겨눕니다
이촌도 안 남은 날이
저를 겨누는 겁니다
자책과 비애가 물 끓듯
저를 끓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제 날을 좀 더 가혹하게
칼갈이로 갈아댑니다
제 날은
머지않아
일촌도 안 남을 겁니다
일촌도 안 남은
날 끝이
제 심장을 겨눕니다
아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제 날의 성공을 빕니다

ㅡ이향지, 오래된 칼ㅡ


※ 일촌(一寸) : 한 토막,  3.3cm




누구에게나 똑같이 강철의 칼이 쥐어져 있습니다

칼은 찌러거나 밸때 사용합니다

칼은 사용할 때마다 닳습니다

그래서 칼의 사용은 사용할 가치가 있을 경우에만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시인은

'죽은 물고기'를 썰며 강철의 날을 축낸것을 후회하는듯 합니다

겉으로 크고 맛있어 보이는 '죽은 물고기'를 썰어 놓고 보니

썩어 있고 냄새도 나고 먹지도 못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일 뿐 입니다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런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 역시 50년이 넘도록 '죽은 물고기'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썰다가 강철의 날을 이토록 축내다니 ..

자책과 비애가 나를 끓입니다



이제 다시

남은 짧게 무뎌진 칼을 봅니다

이것이라도 남아 있다는게 퍽 다행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썰고 싶은 것을 썰기위해

칼을 갈아 둡니다

제 심장을 겨눕니다


심장이 이렇게 말할때

마지막 남은 일촌의 칼을

한 점 망설임도 없이 소진할 것입니다



" 저것이야, 바로 저것이 살아 있는 물고기야"

 

-백난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와 나비 / 김기림  (0) 2017.03.28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0) 2017.03.27
석문의 시간 / 권영준  (0) 2017.03.22
서해 / 이성목  (0) 2017.03.20
밥으로 죽 끓이기 / 이향지  (0) 2017.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