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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 박노해 본문

민들레처럼 / 박노해

난자기 2017. 4. 18. 10:35




일주일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 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진 조직폭력배인지
민들레꽃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합니다
민들레꽃 한 송이로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하며 민들레 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묶은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와 내 손에까지 몰래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는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흔하고 너른 풀잎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순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밟히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 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 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성의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 중에 수천 수백의 꽃씨로 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 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들,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ㅡ박노해, 민들레처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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