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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라 묵는 시 / 박작당

난자기 2017. 8. 28. 18:44

여자아이가 남자아이한테 묻는다
"너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 "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의 기적 소리만큼 " 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날 , 밤중에 문득 잠이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아마 두시나 세시 , 그쯤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몇 시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그것은 한밤중이고 ,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알겠니
상상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안 들려 시계바늘이 시간을 새기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
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기 ,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한테서 ,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장소로부터도 ,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 그리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내가 ,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내가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아무도 모를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서 , 깊은 바닷 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야
기압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 그대로 찍히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릴 것 같은 ... 그런 느낌 알 수 있어 ?"
소녀는 끄덕인다
아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괴로운 일 중의 하나일 거야
정말이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고 싶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자 안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정말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비유 같은 게 아니야
진짜 일이라고, 그것이 한밤중에 외톨이로 잠이 깬다는 것의 의미라고 그것도 알 수 있겠어 ? "
소녀는 다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렇지만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먼 기적 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도 선로 같은 것이 있는지 나도 몰라
그만큼 멀리 들리거든, 들릴 듯 말 듯 하다고나 할 소리야
그렇지만 그것이 기차의 기적소리 라는 것을 나는 알아
틀림없어,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번 , 그 기적 소리를 듣지
그리고 나서 내 심장은 아파하기를 멈춰
시계 바늘은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을 향해서 천천히 떠올라
그것은 모두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렇게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
거기에서 소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밤 중의 기차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와 포옹에 대하여



너는 기껏해야 삐쩍 마른 고독한 여자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은 너보다 거대하고, 단단하고, 복잡하고, 두렵고, 더럽고, 피곤하고, 어지럽고, 어둡고, 야비하고, 몽롱하고, 지겹고, 무시무시하고, 무료하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무튼, 넌, 그렇게, 살다가는
개처럼, 비참하게, 죽을, 거야,
그러니, 그 몽상의 음부로부터,
도망쳐라,
그게, 살, 길이야, 벌레, 벌레, 병신, 같은, 년,
단순한, 의식으로, 머리를,
깡통으로, 만들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
가루가, 되기,
전에, 최선의, 길, 을, 찾는다면, 너도,
결국엔, 나처럼,
살아가게, 될,
거야,

이응준, 그 시절을 위한 잠언


거리를 점령해 들어오는
쓰레기통이 문제가 아니구요
사탄을 도발한 아담과 이브들
쓰레기통 속마다 그득한
네가 버린 나 내가 버린 너
내가 버린 나 등등이 수두룩
더러워서 개도 쓰레기통에는
다리를 못 걸친다구요.

이상희, 쓰레기통



진해에서 훈령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백치, 얼간이, 바보, 미치광이.
우리는 때로 백치가 되기도 하고, 얼간이가 되기도 하고
바보가 되기도 하고, 미치광이가 되기도 한다.
정상인이란 이 네 가지 구성요소,
혹은 이상형이 아주 적당하게 뒤섞인 인간이다.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