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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난다 광산촌 외진 정거장 가까운 대포집 손 없는 술청 연탄 난로 위에 끓어넘는 틀국수 냄새가 난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기차바퀴 소리가 들린다 갯비린내 싣고 소금밭을 지나는 주을이라 군자의 협궤차 소리가 들린다 황새기젓 이고 새벽장 보러 가는 아낙네들의 북도 사투리가 들린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갈대밭이 보인다 암컷 수컷 아우러져 갈갬질하는 개개비가 보이고 물총새가 보인다 강가 깊드리에서 나래질하는 옛날의 내 동무들이 보인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꿈을 꾼다 버들고리에 체나 한 짐씩 덩그머..
빛의 자식인 양 보라는 듯이 원색의 꽃잎들을 펼치는 해바라기는 太陽神을 섬기는 인디언 추장의 머리 같다 자기를 섬기든 말든 개의치 않고 太陽神이 비틀어놓는 늙은 머리들 그래도 오로지 생명의 빛깔이 원색인 곳을 향해 해바라기는 고개를 든다 ㅡ최승호, 해바라기ㅡ
밤새, 초승달과 풀잎은 날을 겨누고 있었다 서늘한 풀벌레 울음 속에 한바탕 초승달이 쓸고 지나간 새벽 풀밭 쪼그리고 다초점 렌즈 안경도 벗고 가까이 더 가까이 고개 숙여 다가가는 내게 휜 풀잎 이슬 털며 날을 세운다 아무도 베이지 않았다 ㅡ고찬규, 백로ㅡ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여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ㅡ함민복, 꽃ㅡ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안주 안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아지매는 할매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ㅡ허홍구, 아지매는 할매되고ㅡ
황산을 다녀온 후 내 방 벽면 정중앙엔 서해협곡 구름 속의 키 작은 노송 한 그루 시공을 뚫고 날아와 도인처럼 앉아 있다 물안개가 허리를 감싸고 돌 때까지 황산 절벽 그 끝의 한 틈새를 파고들어 천년의 바위 살점을 저며 먹는 생명들 천길 벼랑 중간쯤의 허공에서 붓을 들고 어느 만큼 겹칠해야 도인으로 환생할지 바람이 지나가면서 곁눈으로 알려 준다 ㅡ김삼환, 나무도인ㅡ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코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구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코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구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ㅡ오세영, 구월ㅡ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ㅡ최승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ㅡ 나는 가만히 있었다 빈 배처럼 가만히 있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침묵은 내 유일한 배려였다 지나간 시간이 되돌아와 내 등에 살짝 기대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 시간을 받아주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아니,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다 ㅡ최승자, 빈 배처럼 가만히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