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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ㅡ이근배,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ㅡ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 마다 처마 처마 마다 얼음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누가 혈거시대를 보내고 있나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개미와 벌과 또 그들의 이웃 무리가 내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있구나 그날 밤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털고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 별들이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었다 ㅡ손택수, 화엄에서ㅡ
어느 날이든지 어디에 처해서든 어떻게든 언젠가 반드시 맞닥드리겠지 오롯히 나에게만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ㅡ 박작당, 육하원칙
성냥갑 속에서 너무 오래 불붙기를 기다렸다 늙어버린 성냥개비들, 유황 바른 머리를 화약지에 확 그어 일순간의 맞불 한 번 그 환희로 화형도 겁 없이 환하게 환하게 몸 사루고 싶었음을 ㅡ김남조, 성냥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게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ㅡ김정환, 구두 한 짝ㅡ
바깥세상이 시끄러운지라 수학 문제를 풀던 선생님이 잠시 분필을 놓으시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학생 하나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른다 - 선생님 공부나 합시다 - 때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인지라 영어 문제를 풀던 선생님이 잠시 분필을 놓으시고 우리 말 고운 시 하나 읊으려 하자 학생 하나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른다 - 선생님 공부나 합시다 - 이런 학생 나중에 무엇이 될까 세상모르고 공부만 하여 남보다 수학 문제 하나 더 빨리 풀어 일등 하여 일류대학 들어간들 무엇이 될까 이런 학생 나중에 시집 한 권 아니 읽고 공부만 하여 남보다 영어 단어 하나 더 많이 외어 우등으로 일류대학 들어간들 그런 학생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면 시끄러운 세상에 나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말끝마다 입으로 학생은 공부나 하라..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이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ㅡ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ㅡ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ㅡ조오현, 숲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