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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게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ㅡ김정환, 구두 한 짝ㅡ
바깥세상이 시끄러운지라 수학 문제를 풀던 선생님이 잠시 분필을 놓으시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려는데 학생 하나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른다 - 선생님 공부나 합시다 - 때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인지라 영어 문제를 풀던 선생님이 잠시 분필을 놓으시고 우리 말 고운 시 하나 읊으려 하자 학생 하나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른다 - 선생님 공부나 합시다 - 이런 학생 나중에 무엇이 될까 세상모르고 공부만 하여 남보다 수학 문제 하나 더 빨리 풀어 일등 하여 일류대학 들어간들 무엇이 될까 이런 학생 나중에 시집 한 권 아니 읽고 공부만 하여 남보다 영어 단어 하나 더 많이 외어 우등으로 일류대학 들어간들 그런 학생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면 시끄러운 세상에 나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말끝마다 입으로 학생은 공부나 하라..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이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ㅡ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ㅡ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ㅡ조오현, 숲ㅡ
이슬들 모여 앉아 쪽방촌을 이루었다 아침 물고 날아온 새, 살짝 떨군 물똥처럼 물방울 은빛 사리가 가지런히 눈부신 곳 오늘의 특별 손님, 실잠자리, 무당벌레 터줏대감 소금쟁이, 청개구리, 까마중 조금은 옹색하지만 불평 없이 동거하는 주인도 세를 사는 하늘이 맑은 동네 온몸을 톡, 던져서 풀잎 발등 적시는 작아서 더 좋은 것, 저 깨끗한 전신공양 ㅡ유재영, 이슬세상ㅡ
기다림이 쌓여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기다림보다 길고 기다림보다 강한 가로등 하나 그 밑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등불이 내려 몇 십년 기다려 왔던 것이 또 몇 천년 기다려 갈 것을 충혈된 눈동자로 비춘다 세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쓰린 세월은 더욱 쓰라리고 아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하나 그 밑에 아아 평생이 보일 뿐이다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그 밖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ㅡ김정환, 기다림ㅡ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는 저울이다 그 꿈의 무게가 무거우면 초승달이 뜨고 그 꿈의 무게가 가벼우면 보름달이 뜬다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려고 저녁마다 앞 산에 뜬다 ㅡ임영석, 달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