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노래 / 엄원태 본문
가설식당 그늘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것
턱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거나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힘마저 없다
눈곱 낀 눈자위 그렁그렁,
가을 저수지 같다
노래를 틀어대는
주인아저씨보다
곡조의 처연함 몸으로
다 받아들인 개가
여가수의 노래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뼛속까지 사무친다는 게
저런 것이다
저 개는
다음 어느 생에선가
가수로 거듭날 게다
노래가 한 생애를
수술 바늘처럼 꿰뚫었다
ㅡ엄원태, 노래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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