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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로티즘의 변증법

난자기 2020. 4. 12. 16:14

철학, 욕망을 마주하다

에로티즘의 변증법

금기의 위반을 욕망하다

20세기 들어와서 이성 중심적 금욕주의는 사상의 주류로부터 완전히 이탈해 버렸다. 19세기에 이미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인 광기로 이성 중심적 철학을 비판함으로써 이러한 이탈을 추진시켰다. 하지만 금욕주의를 깨뜨리는 발판을 제공한 선구자는 헤겔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이성철학의 체계를 수립하긴 했지만 욕망을 정신이 자기실현하는 주요한 계기로 삼았다. 더군다나 그는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진리란 누구나 흠뻑 취하지 않을 수 없는 바쿠스의 축제다.”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이성철학의 이면에는 욕망의 힘이 작동하고 있고 열정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헤겔의 욕망담론을 현대적 욕망담론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한다.

헤겔 박물관의 헤겔 흉상 <출처: (cc) Muesse at Wikimedia.org>

헤겔: 욕구(Bedürfnis)와 욕망(Begierde)


헤겔이 청년시절부터 신학뿐만 아니라 경제학도 공부해 왔음을 사람들은 종종 망각한다. 헤겔의 <법철학>에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리카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등의 저서가 명시되어 있다. 헤겔이 고전 경제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특히 <법철학>의 「시민사회」 장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는 거기에서 시민의 욕구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헤겔은 대체로 욕구를 결핍 자체로, 욕망을 결핍을 넘어서서 주체와 객체의 통일을 지향하는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이런 파악에 근거해서 「시민사회」 장에 등장하는 욕구를 먼저 살펴보겠다.

욕구


헤겔은 <법철학>의 「인륜」 장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 해당하는 시민사회를 탐구했다. 거기에서 가족의 소박한 인륜은 시민사회에서 상실되어 이기적 분열이 일어나지만 국가에서 이런 분열은 인륜적으로 지양되어 통합된다.

헤겔은 시민사회를 ‘욕구들의 체계’라고 불렀다. 시민사회는 나의 욕구와 욕구충족이 타인의 욕구와 노동에 사회적으로 매개되어 전면적으로 상호의존이 이루어지는 체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법철학>의 시민사회에서도 주관적 이기심이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힘이다.

그리하여 가족의 소박한 인륜으로부터 벗어난 시민들(Bürger)은 욕구충족과 이익추구를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시민사회는 온갖 욕구와 이해관계로 분열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나의 욕구충족은 타인의 욕구와 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에 결국 시민사회에서는 만인이 만인과 서로 얽혀 상호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시민사회에서 욕구는 사회적인 분업과 추상적인 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욕구는 다양화되고 세분화된다. 이를테면,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이 욕구충족을 위한 수단과 방법도 다양화되면서 세분화된다.

그런데 이런 다양화와 세분화는 더욱더 나의 욕구충족을 타인의 욕구와 노동에 의존시킨다. 나는 욕구충족을 위해서 타인에 맞추어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이러한 다양화와 상호의존은 욕구의 자의적 특수성을 사회적 보편성으로 도야한다.

그렇지만 시민사회에서 욕구와 노동의 도야는 형식적 보편성에 그치기 때문에 개인의 특수성이 사회적 보편성과 통합될 수 없고 분열된다. 이러한 통합은 인륜적 국가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에서 욕구는 충족될 수 있지만 결핍된 상태로 끝없이 펼쳐질 뿐이다.

위의 그림은 정(正, Thesis)과 반(反, Antithesis)의 대립과 긴장이 합(合, Synthesis)을 통해 해소되는 변증법의 통속적 도식을 드러낸다. 이 도식을 가족―시민사회―국가로 전개되는 인륜의 변증법에 적용한다면, 가족은 정이고 시민사회는 반이며 국가는 합일 것이다.

욕망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정신이 자신을 인식하고 자기실현하는 여정을 개념적으로 서술한 텍스트다. 이 텍스트에서 욕망은 정신을 추동하는 주요한 계기임은 물론 「자기의식」 장의 주제다.

욕망은 본래 독일어에서는 굶주림과 목마름 같은 생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욕망을 인간학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서 욕망을 다루는데 동물적 욕망과 인간적 욕망을 구분한다.

동물은 그가 욕망하는 자연적 대상을 먹어치움으로써 이 대상을 부정하면서 동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자연적 대상에 얽매여 있다. 그래서 동물은 자기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에 도달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적 대상을 넘어서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즉, 그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롭고 자립적인 인간임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이런 욕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욕망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식적 존재다.

인간은 혼자서는 이런 욕망이 생기지 않으므로 적어도 복수의 자기의식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자기의식이 서로 자신이 자유롭고 자립적인 인간임을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이때 두 자기의식은 이런 욕망충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생명보존이라는 동물의 최고 욕망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자기의식은 생사를 건 인정투쟁에 들어서게 된다.

정신현상학 1807년판 표지

이 인정투쟁에서 싸워 이긴 쪽이 자립적 자기의식, 즉 주인이 되고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진 쪽이 비자립적 의식, 즉 노예가 된다. 주인은 노예로부터 인정받지만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노예는 주인을 위해 봉사하고 노동하는 반면에 주인은 노동하지 않고 향유할 뿐이다.

그렇지만 주인은 노예의 노동과 봉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자립적 의식으로 전락한다. 그 반면에 노예는 사물을 소비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의 자립성을 인식하고 자신이 자립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주인과 노예는 둘 다 인정받을 수도 없고 둘 다 자기의식이 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런 인정은 절반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서로 다른 자기의식들이 자유롭고 자립적인 상태로 서로 맞서면서도 통일되어 있는 상호인정, 즉 ‘나이면서 우리이고 우리이면서 나인’ 정신의 개념은 의식과 대상이 통일되는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인 절대정신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이로써 인간적 욕망은 충족되는 셈이다.

바타유: 에로티즘과 동굴벽화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철학을 조롱하려 했고 철학자이기를 거부했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였다. 그는 니체와 사드의 사상을 이어받아 에로티즘과 악의 심연을 들여다보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1930년대에 코제브1)(Alexandre Kojève, 1902~1968)의 헤겔 강의를 듣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도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는 그가 에로티즘을 통해서 욕망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에로티즘을 어떻게 동굴벽화에 적용했는가를 <에로티즘>과 <에로스의 눈물> 등을 통하여 살펴보겠다.

에로티즘(Erotism)


그에 따르면, 욕망이란 결핍으로부터만 나오는 게 아니라 금기로부터도 나온다. 금기는 법, 도덕, 관습과 같은 것으로서 노동과 공동체의 일상적인 삶의 질서를 보호해 준다. 그러나 금기는 비논리적이어서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므로 금기의 위반을 충동질한다. 금기를 위반하려는 자는 금기 앞에서 공포를 느끼지만 그럴수록 금기를 위반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강해진다.

동물은 노동도 하지 않고 금기도 없다. 그리고 동물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성적인 행동에서는 본능적이다. 그 반면에 인간은 노동을 하기 때문에 삶의 목적을 인식하고 금기도 세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고 성적인 쾌락과 유희를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 욕망은 동물적 욕망과는 다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금기가 있다. 이 금기란 죽음의 금기와 성의 금기다. 죽음의 금기로 말미암아 인간은 무덤을 만들고 살해를 금지하였다. 성의 금기로 말미암아 인간은 근친상간을 금지했다. 당연히 동물에게는 이러한 금기가 없다.

인간은 금기를 위반할 때 동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금기의 위반은 무한정 허용되는 게 아니라 그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금기란 한두 번 어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위반은 금기를 없애는 게 아니라 금기를 지양하여(aufheben)2) 완성한다. 그러므로 금기를 위반하려는 욕망은 동물적 욕망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이다.

바타유는 금기를 위반하려는 욕망을 에로티즘으로 보았다. <출처: (cc) Grendelkhan at the English language Wikipedia at Wikimedia.org>

금기를 위반하려는 욕망은 공동체와 노동의 일상적 질서를 전복하고 금기로 닫힌 현실을 파열하기 때문에 낭비적이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욕망이 에로티즘이다.

경제의 차원으로 바꾸어 말하면, 에로티즘은 유용성과 효율성에 바탕을 둔 생산과 축적의 제한된 경제(노동과 금기의 세계)의 과잉을 공동체의 결속과 유대를 지향하는 비생산적 소비와 낭비의 일반적 경제(축제와 위반의 세계)로 털어낸다.

그는 에로티즘을 죽음을 통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인간은 본래 고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연속성을 추구한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만 존재의 연속성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도 이 연속성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남녀 사이의 성적인 환희다. 남녀는 성적인 교접에서 인간의 탈을 벗고 동물이 되어 발광하다가 쾌락의 절정에서 의식을 잃고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절정을 작은 죽음(le petit mort)이라고 부른다.

그는 남녀 사이의 성적인 환희에서 겪는 이런 체험은 종교적인 법열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에로티즘은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접근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종교적 신비체험과 같은 내적 체험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

그런데 내적 체험이란 가능한 것의 한계, 극단에까지 치닫는 여행이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에로티즘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해의 편의상 에로티즘을 금기를 위반하려는 폭력적인 욕망으로 일단 정의해두자.

동굴벽화


서유럽에서 4만여 년 전에 이주한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을 몰아내고 동굴벽화의 예술을 창조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였지만 크로마뇽인들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였다.

서양의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크로마뇽인들이 서유럽에 정착했던 시기에 예술이 탄생했다고 보고 있고, 바타유도 라스코 동굴과 베제르 계곡3)의 벽화가 예술 탄생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네안데르탈인의 몫이 아니라 크로마뇽인의 몫인 셈이다.

젊은 시절부터 바타유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195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선사시대 예술을 탐구했다. 특히 라스코 동굴벽화는 그의 일생일대의 관심사였다.

라스코 동굴벽화 <출처: (cc) Prof saxx at Wikimedia.org>

라스코 동굴벽화를 포함해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그중에서 유력한 가설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을 위해 동굴벽화가 만들어졌다는 가설이 있다. 앙리 브뢰유4)(Henri Breuil, 1877~1961) 등이 제시한 가설이다. 이에 따르면 동굴 벽에 그려진 동물들은 고기를 먹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가설은 그 당시 구석기인의 식량이 동굴에 가장 많이 그려진 말과 소가 아니라 순록이었다는 과학적 증거에 의해 약화될 수 있다.

둘째로, 무격신앙(Shamanism)에 근거해서 동굴벽화가 만들어졌으며 동굴은 성소였다는 가설이 있다. 엘리아데가 처음으로 제시했고 고고학자 루이스-윌리엄스(David Lewis-Williams)가 발전시킨 가설이다. 현재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지만 탈혼 상태(Trance; 무아지경의 몽환적 상태)에 빠진 무당은 설명할 수 있어도,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된 동물들의 그림은 설명할 수 없다.

바타유가 살았던 시대에는 앙리 브뢰유가 주장한 첫 번째 가설이 득세하였다. 고고학자가 아닌 그는 어느 정도 이 가설을 수용하면서 대담하게도 동굴벽화는 에로티즘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에로티즘을 동굴벽화와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 당시 고고학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바타유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 중에서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관능적인 유물들을 찾아내어 현생인류 초기의 예술에 이미 에로틱한 성격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레스퓌그 비너스5)(Lespugue Venus), 로셀(Laussel)의 남녀 교접 암각화, 우뚝 선 남근이 묘사된 벽화 등이 그런 것들이다.

가슴과 엉덩이 부분이 크게 강조된 레스퓌그 비너스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구석기인들의 마음이 담긴 여성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타유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동굴벽화는 라스코 동굴의 가장 후미진 곳의 우물에 그려진 그림이다. 물론 라스코 동굴벽화의 다른 동물 그림들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살해된 동물들의 영혼을 주술적으로 달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물에 그려진 그림은 살해와 속죄의 에로티즘으로서 그에게 다가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머물렀다.

창에 맞아 배가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고 있는 들소가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곁에서 무당이 새의 머리를 하고 남근이 발기된 채로 죽어(?) 있고 무당의 오른쪽 막대기 위에 새가 앉아 있다. 들소는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면에 무당과 새는 유치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장면이다.

라스코 동굴벽화에 나오는 동물들의 그림을 포함해서 이 그림도 살해와 속죄의 종교적 제의를 보여준다고 그는 <에로티즘>에서 주장했다. 후기 구석기인들에게 동물들은 인간에 맞서는 존재가 아닌 신성한 친구였다. 그들은 동물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동물의 살해는 암묵적인 금기였다.

게다가 동물의 세계로부터 갓 벗어난 그들은 동굴벽화에 인간의 모습을 그리되 동물의 가면으로 그 얼굴을 숨기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동물들을 살해하고 먹으려 할 때 죄책감과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살해된 동물들을 동굴 벽에 그려 속죄함으로써 죄책감과 고뇌를 초월하려 했다고 바타유는 해석했다.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동물성을 부정한 인간이 자신을 다시 부정하여 동물성과 인간성 너머 신성으로 초월하려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코 동굴의 후미진 우물에 그려진 수수께끼 그림 <출처: (cc) Peter80 at Wikimedia.org>

바타유는 <에로스의 눈물>에서도 이 그림은 들소를 살해하고 속죄하는 에로틱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일단 해석했다. 하지만 이어서 그는 이것이 최종적인 해석이 될 수는 없으며 이 장면의 수수께끼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의할 수 없는 에로티즘을 밝히려고 했듯이 풀 수 없는 이 수수께끼에 대해 답을 내려고 노력한 그의 시도는 역설적이다.

바타유가 에로티즘을 종교적 제의와 연결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했을 뿐만 아니라 금기의 폭력적 위반과 낭비를 정당화하려 했다고 우리는 그를 비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러한 폭력과 낭비가 대량파괴무기의 생산이나 전쟁의 방식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포틀래치6)와 같은 부의 증여, 예술, 문학, 종교 등을 통해 일어난다면 그것이 공동체적 유대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음을 우리는 고려해야 하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에로티즘의 변증법 - 금기의 위반을 욕망하다 (철학, 욕망을 마주하다, 조홍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