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정신과 병동 / 마종기 본문

정신과 병동 / 마종기

난자기 2022. 3. 9. 10:33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 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풍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
지겹지 않고, 
가운 입은 피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ㅡ마종기, 정신과 병동ㅡ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길 / 김정환  (0) 2022.03.22
새떼에게로의 망명 / 장석남  (0) 2022.03.11
황홀한 죽음 / 전순영  (0) 2022.02.25
귀가 / 임동천  (0) 2022.02.15
단계 / 헤르만 헤세  (0) 202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