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밥그릇 / 정호승 본문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 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ㅡ정호승, 밥그릇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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