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실존 논쟁/ 화자들- 샤르트르, 카뮈, 소크라테스, 이은유 시인, 난자기, 작당이 본문
[작당이]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과민성 대장증후군 걸리것다
[난자기]
무엇이든 되야 한다고 배운 그 시절에
희망을 일러준 훈계는 복통과 배변장애를 유발하고 몸밖으로 빼내 버리지 않으면 안 될 불량식품
같은 불안을 파묻히게 했다..
나와비슷한 증상이네 ..
[사르트르]
불안이란 자유가느끼는 현기증이다. 우리가 불안을 벗어날수 없는 것은확실하다.
우리가 불안 그 자체이므로..
인간은 다른 본질이나 가치에 기대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 남겨지며 때문에 스스로 절망하며 자유롭게된다.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불안하게 된다. 불안은 실존에 관한 인간공유의 구조적 감정이다..
[작당이]
불안이란 또다른 관점에서 보면...
불안은 타인이라는 존재가 있기때문에 생기는 심리상태이다
[난자기]
실존적 인간의 구조적감정이다캐따
사르트르행님이 ..
위 시에서 불안을 잠식해서
불안에 함몰되어서야 비로서 내가 나를 사랑할 수있다고 한다
[작당이] 흔히 인간은 본래 혼자고 고독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라꼬
생강하는데 틀링기다
인간은 태어날때 부터 죽을때까지 단 한번도 혼자일 수가 없는 존재다
불안은 누군가로 부터 단절되지 않을까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난자기]
절망은 때로 지명수배를 당한다
늘 감시자로 있는 세상을 모르고
너무 일찍 절망을 배웠다
불현듯 집을 나선 스무살 여름에
용의자를 찾고 있는 세상에게 절망을 붙잡혔다
절망을 아무렇게나 발설한 스무살 여름에
대책없이 들켜 버렸다
지울 수 없는 약력처럼
스무살을 기억하는 것은 전과 기록을 들춰 보는 것이다
행적을 들킨 스무살 여름은 부끄럽다
나는 절망의 체포로부터 풀려나고 싶었다
그러나 선고 판결은 끝이 나지 않는다
정상을 참작한 집행유예 기간은 인생 전반
절망의 스무살을 지우지 못한다
절망은 나를 늙어 버리게 한다
절망은 때로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숨기고 있어야 아름답다는 것을
그 때에 나는 이미 늙어 있었다
천안에서의 하룻밤 / 이은유시인
[작당이]
근세서양 철학은 논리의 선명함을 위해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여 현상을 설명하려 해따
타자니 즉자니 실재니 관념이니 본질이니 하며 주로 쪼개가면서 세계를 해석하였는디
그게 저지른 병폐가 크다
모든 것을 자기로 부터 떼어내어 난공불락의 소자아의 세계를 맹글어 내 부렸다
오늘 날 만연한 개인주의와 자유라는 미명하에 저질러 지는 방임적 수탈에는 저들의 영향이 적지 않다
현대는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모색을 하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
요즘 학계으 트랜드가 통섭과 융합이다
해부의 시대는 바야흐로 종식되어 가고 있다
그로 인한 생명말살과 관계의 유리를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다는 인식의 공유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하나의 제언을 하자면
이제 그만 근세를 벗어나 현대로,
서양을 벗어나 동양쪽으로 견문의 지평을 넓혀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통섭이나 융합의 얘기라면 우리가 훨씬 더 강한 분야 아니것는가....음
[작당이]
불안감이 인간본유의 구조적 감정이라꼬 샬트르가 얘기하고 있는 거슨 지극히 실존적 차원에서의 얘기다
샬트르에게 실존은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윈도우(운영체계)다
세상은 실존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병 속에 구슬이 가득 담겨 있다고 해서 병 속에는 구슬만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기다
구슬이 차지하는 공간 외에도 그 사이사이 비어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가 말이다
샬트르의 오류는 구슬만 보고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거시고, 그런 인식으로 인해 실존을 당연명제로 여기고 급기야 불안감은 실존에 대한 인간고유의 구조적 감정이라꼬 카는 성급한 결론을 도출해낸 것이다
이 세계는 실존과 실존적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생,로,병,사 라는 구슬만 있다면 그 실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연 인간은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살하지 않고 실존을 저항해내는 이유….
그게 무엇인지,
내게 주어진 비어있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가 먼지 고걸 생강해보는 하루가 되자꾸나
[난작이]
니 생각을 잘 대변해 주는 정치세력이 녹색당이다
"나는 모든 것이 설명되거나 無이기를마란다. 그런데 이성은 마음의 이 외침앞에 무력하다. 이러한 요구에 의하여 정신은 탐구를 계속하지만 모순과 헛소리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련데 세계는 비합리로 가득차 잇다. 단하나의 의미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이 세게는 거대한 비합리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단 한번이라도 '이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할수 있으면 모든것은 구원될수 있으리라.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것도 분명한것이 없고 모든것은 혼돈이라는것, 인간은 다만 자신의 통찰과 그를 둘러싼 부조리의 벽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것을 앞 다투어 선언한다.. ..
.. 카뮈형님의 말이다
[난자기]
세계는 볼수 있는 것과 볼 수없는 것 즉, 인식되지않는 부문이 너무 많다. 인식할 수없는 이 영역이 부조리다. 니가 말하는 비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
그 영역을 겉모습이나마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실존적 자아의 통찰뿐이다
[난자기]
오죽했으면 소크라테스형님도 내가 유일하게 깨달은 진리는 "나는 무지하다"라는 것 밖에는 없다고 했으까?
[작당이]
소쿠리 행님의 그 말은 그 단계에서 멈추자는 거슨 아니잔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에서부터 출발하자는 거잔아?
근디 카뮈에 의하면
그 출발점을 떠난 지금까지의 어느 누구의 말도 합리적이지도 확실한 것도 엄따고 카고이따
이런 견지에서 보마는 소쿠리의 말 "나는 무지하다" 는 그저 선언적 의미만 가지는 것 아니것나?
혹은 리셑스위치 역할인가?
카뮈나 샬트르는 세상은 부조리한 실존으로 가득차 있기만 한,
합리적이거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엄는 곳이라꼬 선언해버리고는 그 뒤의 일은 불안감으로 자살을 하든 돌쇠 처럼
저항을 하든 니들이 알아 해라 이칸거나 다름엄따
작금으 철학자들이 실존주의를 한때 시대를 휩쓴 한 사조 정도로 여겨 현재는 다락방 구석탱이로 처 박아 두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단단하고 훌륭한 논점이기는 하지만 현상을 설명하기만 하고 현실을 개선해내지 몬하는 사상은 결국 용도폐기 아이것나?
불안과 부조리는 과연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인가?
염세주의와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이 휩쓸고 다녔던 근세의 얘기에 언제까지 매달려 있으려 하는가?
무지를 인식한다는 것은 앎을 향한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 출발점을 떠나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소 혼란하고 정리되지 못한 여행길이 될지라도,
누군가가 “여행자여! 여기에 다다른 그대가 아는 것은 여전히 없지 않은가?" 이카며 그대를
물타기하려 들지라도,
"나는 길 위의 사람이고 길 옆에서 턱 괴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 라고 당당하기를...
不識廬山真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건 내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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