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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 이영광 본문

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 이영광

난자기 2016. 11. 11. 11:56

너거 부모 살았을 때 잘하거라는 말은 타관을 오래 떠돈 나에게
무슨 침 뱉는 소리 같았다

나 이제 기울어진 빈집,
정말 바람만이 잘 날 없는
산그늘에 와 생각느니
살았을 적에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무대 위에서 잠깐 어른거리는 것은
막 뒤의 오래고 넓고 깊은 어둠에 잠기기 위한 것,
산다는 것은 호두나무가 그늘을 다섯 배로 늘리는 동안의 시간을
멍하니 앉아서 흘러가는 것

그 잠깐의 시간을 부여안고 아득히 헤매었던 잠깐의 꿈결을 두 손에 들고
산다는 것은, 고락을 한데 버무려 짠 단술 한 모금 같은 것

흐르던 물살이 숨 거두고 강바닥에 말라붙었을 때
사랑한다는 것은, 먼지로 흩어진 것들의 흔적 한 톨까지도
끝끝내 기억한다는 것
잘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것

죽은 자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깡그리 죽어 없어진 뒤에도
호두나무 그늘을 갈구리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
바지에 똥을 묻힌 채 헛간 앞에서 쉬던 생전의 그를,
젖은 날 마당을 지나가는 두꺼비마냥 뒤따라가 그의 자리에 앉아 더불어 쉬는 것,

살아서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있으랴
호두알이 떨어져 구르듯 스러진 그를 사람들은 잊었는데
나무 그늘 사라진 자리,
찬바람을 배로 밀며
눕기 위해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무도 보지 못하는데

ㅡ이영광,
호두나무 아래의 관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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