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바둑시편 / 장석주 본문
패착과 자충수로 끝난
일국
이마를 찧는다
나가고 물러설 때를
아는 일은 어렵다
지금은 장고중,
돌이 놓여야 할 자리는
딱 한 군데다
이 반상에서
흑과 백은 돌로서 평등하다
이 무등의 나라에
피바람이 휘몰아친다
천원이 흐려지고 화점마다
싸움이다
일국의 삶이
있을 뿐이다
급소를 맞자
바로 판세가 기운다
유랑하는 곤마들
평생을 가난에 쫓기다가 맞은
고단한 노경!
축이나 회돌이에 걸려
돌들이 한 무더기씩 뜯겨 나간다
초년 운은 축이고
말년 운은 회돌이다
이 판은 글렀다!
죽은 돌들이 흘린 피가
낭자하다
오, 핏물 위에
수정 무지개!
속수에 당하다니!
기운 국면,
자책은 깊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핀은 끝난다
어떤 경우에도
착점을 되돌릴 수는 없다
두 눈 못 낸 대마가
꿈틀대며
무겁게 앞으로 나간다
욕계의 불길 속,
아들아, 사는 건
꽃놀이패가 아니더구나
흑과 백을 끌어안은
태극이다
대나무는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반상 위에서는
삶과 죽음이 찰나로 엇갈린다
순간마다 백 년이
반상 위로 흘러간다
혼자 복기를 한다
패국의 빌미가 된
뼈아픈
딱 한 수의 과욕!
흑백 돌들이 판 위에 어지럽다
저녁은 모둠발을 딛고 오고
축에 걸린 돌들은
속수무책이다
고독이 내 몸에 채찍질을 해 댄다
피 마르는 싸움은
끝나고
몇 군데 잔 끝내기만 남겼다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없는 화국이다
다시 계가를 해 보지만
좁혀지지 않은 한 집 반 차이
이제 패배를 받아들이는 일뿐
공배를 메우는
손끝에 초저녁 별들이 뜬다
퇴로가 끊겼다
대마가 살길은 없다
전체를 놓치고 부분에 집착한 탓,
이기는 법은 단순하나
지는 이유는 천 가지다
행복은 단순하고
불행은 복잡하지 않던가
거울의 뒷면 같은 진실,
더 큰 진실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다
ㅡ장석주, 바둑 시편ㅡ
진실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밤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0) | 2016.11.17 |
---|---|
고비의 고비 / 최승호 (0) | 2016.11.14 |
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 이영광 (0) | 2016.11.11 |
충남당진여자 / 장정일 (0) | 2016.11.10 |
병들어 보지 않으면 / 코우노 스스무 (0) | 2016.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