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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2) / 김훈

난자기 2017. 5. 16. 11:49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 여린 것들이 언 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쑥은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으로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더 많이 된장쪽으로 끌려간다.

국물 속의 쑥 건더기는 다만 몇 오라기의 앙상한 섬유질만으로 남는다.

쑥이 국물에게 바친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이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속에 펴져 있다.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니다.



(김훈, 자전거 여행중에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기도하다.
세상은 겨우 존재하는 것들로 대부분 이루어지고,
겨우 존재하는 것들로 인하여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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