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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기일기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이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ㅡ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ㅡ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벌레들을 기르며 ㅡ조오현, 숲ㅡ
이슬들 모여 앉아 쪽방촌을 이루었다 아침 물고 날아온 새, 살짝 떨군 물똥처럼 물방울 은빛 사리가 가지런히 눈부신 곳 오늘의 특별 손님, 실잠자리, 무당벌레 터줏대감 소금쟁이, 청개구리, 까마중 조금은 옹색하지만 불평 없이 동거하는 주인도 세를 사는 하늘이 맑은 동네 온몸을 톡, 던져서 풀잎 발등 적시는 작아서 더 좋은 것, 저 깨끗한 전신공양 ㅡ유재영, 이슬세상ㅡ
기다림이 쌓여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기다림보다 길고 기다림보다 강한 가로등 하나 그 밑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등불이 내려 몇 십년 기다려 왔던 것이 또 몇 천년 기다려 갈 것을 충혈된 눈동자로 비춘다 세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쓰린 세월은 더욱 쓰라리고 아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하나 그 밑에 아아 평생이 보일 뿐이다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그 밖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ㅡ김정환, 기다림ㅡ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는 저울이다 그 꿈의 무게가 무거우면 초승달이 뜨고 그 꿈의 무게가 가벼우면 보름달이 뜬다 달은 이 세상 사람의 꿈의 무게를 달아주려고 저녁마다 앞 산에 뜬다 ㅡ임영석, 달ㅡ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ㅡ문정희, 돌아가는 길ㅡ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 없는 몸뚱이로 팔려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나, 관객이 있다 幻으로 배 불러오는 욕정 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幻인 줄 알면서 나는 幻에 취해 실감나게 펼쳐지는 幻을 끝까지 본다 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 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ㅡ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ㅡ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節度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