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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위의 잠 /나희덕 본문

못 위의 잠 /나희덕

난자기 2017. 9. 11. 11:27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ㅡ나희덕, 못 위의 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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