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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연필로 쓰기ㅡ 본문

정진규, 연필로 쓰기ㅡ

난자기 2020. 6. 2. 12:38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 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 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 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 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ㅡ정진규, 연필로 쓰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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