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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평범한 달력ㅡ 본문

김승희, 평범한 달력ㅡ

난자기 2020. 6. 4. 13:52
처음 달력이 올 때
누구나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을 것이다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처음에 달력은 평범한 숫자들의 나열이었을 것이다
검은 숫자와 빨간 숫자는
평범한 약정에 불과했을 것이다
평범한 숫자에서 시작된 달력은
자신도 모르는 새 운명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기념일은 되도록 없는 것이 좋지만
운명의 기호가 차곡차곡 쌓여
운명 아닌 숫자가
차츰 줄어들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 아주 새로운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무덤에서 아기가 나오고
물 위의 수련들이
하얀 거북 알을 낳고
진홍 보다 더 붉은 선홍빛 죄가
흰 눈 보다 더 하얘지고
하늘의 해가 두 개 뜨고
헬리콥터가 보리밭에서 이륙하면서
결혼사진을 찍고 있던
어느 신부의 면사포를 찢고
바퀴에 휘어 감긴
면사포에 질질 끌려가다가
허공중에 목이 졸려 죽은 여자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울면서 세례를 받고
다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달력 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았던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달력은 더 이상
평범한 숫자가 아닐 것이다
기어코 누구에게나 평범하게
끝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ㅡ김승희, 평범한 달력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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