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얼음 속의 밀림 ㅡ 본문

얼음 속의 밀림 ㅡ

난자기 2020. 6. 19. 13:01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 놓은 힘은,

결빙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 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法과 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 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 본다
청정한 法과 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ㅡ김기택, 얼음 속의 밀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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