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하지의 산란ㅡ 본문

하지의 산란ㅡ

난자기 2020. 6. 22. 22:49
그늘을 접은 오후가 박스 안에서 줄줄 흘러내린다
제 몸을 찢으며
뿌리의 물관부 따라
조금씩 어둠을 빨아먹던 시간

시간의 내부엔 하지를 견뎌온 빛의 산란이 있다
햇살을 산란하기 위해
하얗게 분꽃 피워본 적 있다
꽃은 왜 피나
왜 피어나나
누군가 말해주세요 이 생의 비밀

수축된 언어들이 하지의 기억으로
밤마다 허옇게 늙어간다
땅속 깊이 누웠던 기억이 많을수록
뿌리의 경작은 길어졌다
기억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들은
검은 비닐봉지 속
또는 종이 박스 안에
웅크리고 앉아
한 움큼의 싱싱한 슬픔을
나눠 먹고
서툰 날개 비틀며
하지의 꿈을 뒤적인다

한때 잘
나가던,
너무 잘나가
여기에는 없는 사람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

그를 따라 한 시절
하얗게 분꽃 피워본 적 있지
지금은 봉인된 종이 박스 안
뿌리만 무성하게 경작하지
어떡하지?
오! 나도 하지 감자.

ㅡ박경란, 하지의 산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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