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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시인

난자기 2023. 7. 21. 09:21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 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 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ㅡ함명춘, 무명시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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