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그림을 망치다 본문
담묵에서 농묵으로
강렬하고도 차분하게 처리된 수묵화
네가 남긴 산사 같던 적요 기울어가는
저녁 그림자
너는 원근이 구분되지 않는
흐린 먹물로 거기 서 있다
정좌한 기와집들이 소리 없이
지켜보고 있는 골목
절묘하게 마무리해놓은 농담 기법,
눈 내린 뒤 쇠종 속에 갇힌
물고기 울음소리처럼
붓끝에 머물러 있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동네가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 켤 때
세필로 뻗어가는 골목을 따라
점 하나 찍는다
너의 형상으로 다시 되살아나는
그 점 속으로 들어가
한 점 농묵으로 섞여 번져간다
문득 목탁 소리처럼 다시 눈은 내리고
먹물 한 점이 그림 전체를
먹어 들어간다
ㅡ김은옥, 그림을 망치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