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어떤 하루 / 강기원 본문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홀로
하루를 보낸다
설렘 없이
울렁증 없이
슬픔 없이
그저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 뿐이다
그런 마음이다
견디는 바 없이 보내는
이런 드문 하루는
가볍고 가볍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가을이
눈동자만큼 깊다
아침이었는데
벌써
저녁이다
하루살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속화할 따름이다……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려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 한병철 피로 사회 중에서 -
그 깊은 심심함
흔한 외로움은 아니다
고독도 아니다
그냥 심심함,
할 일 없음,
無限의 세계로 끝없는 여행
뻥 뚫린 콧구멍으로
날숨과 들숨소리 휙휙 지나가는 소리
횡경막이 오르내리기를
수백번, 수천번
5시간후에나 도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간이역 대합실
사람들은 똑닥거리는 초침을 따라가다
시간마져 잊어버린다
생각들의 꼬리가 꼬리를 비틀어 물어
뫼비우스가 되고
안과 밖이 한몸으로 춤을 춘다
자웅동체 (雌雄同體)가 된다
수 억년 전
어떤 알갱이는 깊은 꿈속에서 물질이 되고 생명이 된다
자궁속에서
알속에서
땅속의 컴컴하고 먹먹함속에서
물질은 빛이 된다
모든 잉태하는 것들은
그 깊은 심심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 깊은 심심함 / 난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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