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세월이 가면 / 박인환 본문
1956년 이른 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명동의 한귀퉁이
예술인 몇 명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의 옷자락'에 대해
애기하고 있었을까?
술기운이 돌자 그들은 일행가운데 끼어 있던 여가수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여가수는 노래를 하지 않았다
그때 한 시인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시한편을 쓰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떤 작곡가가 즉서에서 시에 운율을 넣었다
그리고 여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을 지나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세월이 가면' 이라는 시와 노래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일이 있고 며칠 후
그 시인은 무엇이 무서웠는지 31살의 젊은 나이로 서둘러 세상을 떠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라고 말하던 시인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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