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지렁이 / 최승호 본문
나는 별다른 믿음의 길도
헌신의 길도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길 없는 나로서는
배를 끌고 다니는 길이
내 믿음의 길이었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흙을 갈아엎는 일이,
헌신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행의 길도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늘 알몸인 채로
컴컴한 토굴에 들어앉아 있었지만,
無爲였을 뿐, 별다른 고행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우상도 두지 않았다.
팔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나는 구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고행보다는 잠을 선택했다.
ㅡ최승호, 지렁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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