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백난작, 질주 ㅡ 본문
검은 눈들이 보고 있었다
모두 21개의 눈들이었다
눈들은 대부분 빛이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눈들을 감시하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눈들이 나의 감시자가 되었다
내가 움직이면 눈들도 움직였고
잠들면 그들도 잤으며
아무도 닿지 못하는 의식의 깊은 심연까지도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소름 돋는 공포였다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였다가
뼈아픈 굴절이었다가
애잔한 연민이기도 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
눈들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눈들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검은 하늘에 장대같이 흰 비가 쏱아지던 날
한 눈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두 눈이 손잡고 도로를 질주하였다
눈이 풀린채로
맨발로 도로를 질주하였다
바람개비가 쌩쌩 돌고 있었다
도로는 컴컴해서 앞이 잘보이지 않는데도
도로를 질주하였다
씨가 검은 해바라기가 장승처럼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일도 다른 두 눈이
손잡고 도로를 질주하였다
검정색 대문앞에서
기한 지난 공과금 고시서를 꺼내
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시 도로를 질주 하였다
눈들이 죄다 도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로가 소란해지자
어떤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무섭다고 하면서
도로를 끊어 버렸다
이 후 눈들의 눈동자는 점점 작아지고
흰자위가 강같이 넓어졌다
붉게 핀 백일홍 꽃잎이 뚝뚝 떨어졌다
꽃잎을 밟고 지나간 자동차바퀴가
도로를 피로 물들이자
사람들은 핏길을 걷게 되었다
눈들의 눈동자는 흰자위 안을
질주해 보지만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며 꽃잎처럼 쓰러졌다
그럴때면 눈들이 나를 더욱 쫓아왔다
수분을 갈망하는 수술같은
끈적한 시선들이 나를 칭칭 감고 있었다
나는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끊긴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도로옆 덤불사이에서
다리를 절룩거리는 고라니가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운명의 도로를
우연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고라니도 절룩거리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ㅡ 백난작, 질주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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