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 허수경 본문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페터 한트케 | 허수경
에드바르 뭉크, [이별] 작품 보러가기
아무도 이별을 사랑하지 않지만 | 허수경 글
“그렇네. 이제 이야기로만 남아버린 한 시절.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면 우린 깜짝 놀라지, 그런 때가 있었나, 라고. 정말? 이라고 되물으며 그 시절을 돌이키면 그 시절과의 이별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 속을 서성이다가 마치 신발을 들고 조용히 사라져버린 손님처럼 우리 바깥으로 나가버린 거야. 그때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지. 그 시절이 나를 이만큼 살아오게 했고 이만큼 절망하게 했고 그리고 이제 시절로만 남았네, 라고. 한 시절은 삶의 한 퍼즐 조각이 되어 미래에 올 다른 퍼즐을 위해 귀퉁이를 남겨두는 것. ”
그랬네. 한트케의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속의 주인공처럼 곧 서른이 되는 즈음에 나는 떠나왔네. 나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던 아내는 없었지만.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서울을 떠나오던 1992년 늦가을, 나는 광화문 근처에 있던 작은 방에 있던 가구와 책과 편지와 사진들을 정리했다. 어수선한 그 방 안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짐 싸는 것을 멈추었다. 책을 읽다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면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보였다. 키가 큰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었나? 감은 늦가을의 하늘에 아픈 등불처럼 아직 달려 있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길을 지나 나를 방문하던 사람들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언제나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던 사람. 꽃다발을 들고 이른 일요일에 찾아오던 사람.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왔던 사람. 저녁의 안부를 위해 술을 들고 오던 사람. 밤거리의 쓸쓸함을 피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던 사람. 그들 모두와 이제 이별을 깊숙이 하며 나는 거의 숨을 쉬지 못 하겠다 싶은 순간에 이 책을 읽었지.
결국 우리는 생애의 어떤 순간과 동일시할 수 있는 책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까? 이 책이 그랬다. 비행기를 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처음 디디던 내 손가방에는 이 책이 들어 있었지. 받았던 짧은 편지는 없었으나 해야 할 긴 이별은 있었기에. 이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마음속에서 로드 무비를 찍다보면 한 시절과 이별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기에.
책 속의 편지는 짧지만 긴 이별 여행으로 주인공을 이끌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 전부를 환기시킨 저 짧은 문장.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뿐 아니라 서른이 될 때까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시간들이 한꺼번에 폭풍처럼 밀려오게 만든 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시절과 이별을 하지 않으면 더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는 기이한 불안.
나 역시 그랬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스스로를 바꿀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지. 스스로를 바꿀 힘이 내 안에 없다면 떠나는 방식이라는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중부 유럽의 아주 작은 도시, 마르부르크라는, 그림 형제가 살았다는 동화의 도시로 왔었지. 그 무렵의 한트케의 말을 인용하면 나는 이랬다.
“이 두려움.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다른 존재로 변신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합쳐져서 나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쏘다니는 일. 한트케의 주인공이 미국을 쏘다니는 것처럼 나 역시 쏘다녔다. 마르부르크 성까지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1리터 물병을 두 개나 짊어지고 하루에도 몇 번을 오르내렸다. 라인 강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마인 강으로 가서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다리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기도 했다. 비가 오는 그 다리 위에 서서 나는 이별하고 온 모든 것을 지그시 눌렀다. 값싼 기차표를 구해 독일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19세기 말의 건물과 발코니만 즐비한 도시의 골목을 걷기도 했지. 어떤 변화가 나에게 찾아올까? 기적처럼 조금은 다른 존재로 나는 서른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답은 없고 물음의 구름 떼가 하늘을 자욱하게 덮었던 나날들.
쏘다니고 쏘다니다가 작은 펜션을 발견하면 우선 주머니를 살피고 들어가서 방이 있는지 묻는 것. 방과 내 주머니 사정이 맞아떨어지면 열쇠를 받아 그 낯선 곳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어두운 거리나 언덕이나 산이나 바다를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러면서 다시 이 책을 들추었지.
“내가 받은 인상들이라는 게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 인상들의 반복일 뿐이라는 거야. 그 말은 내가 아직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보지 못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해.”
변한다는 건 뭘까? 사물을, 세계를 다르게 본다는 걸까? 보는 것이 달라지면 인식도 달라지고 그 달라진 인식이 또 다른 사유를 하게 만들까? 어쩌면 내가 변할 때 진정한 이별이라는 거, 찾아오는 건 아닐까?
페터 한트케.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했다"고 말했다. <출처: Larry Yuma at en.wikipedia.org>
주인공은 아내 유디트와 끊임없이 불화했다. 지금까지의 그의 삶은 “많은 것을 허용받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바깥으로 불러내어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떠나와서도 옛날과 마주친다. “이곳 미국에서 어릴 적에 했던 경험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이미 오래 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온갖 불안과 동경이 다시 도지고 있어. 어릴 적에 경험했던 것처럼 갑자기 주변 세계가 두 조각이 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무엇인가로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아.” 길 위에서 나도 자주 나의 과거와 마주쳤지. 나의 과거만이 아니라 그 과거 안에서 요동치고 있던 감각도, 누군가를 생각하던 버릇도, 혹은 누군가를 미워하던 버릇도. 그건 아주 무시무시한 재회였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라 이미 한트케도 그렇게 적어두었네.
떠나는 일은 쉽지만 길 위에서 한 시절과 진정한 이별을 하는 것은 어렵지. 한 인간에게 어떤 시절, 이라는 것은 한 보따리의 시간만이 아니라서 그래. 어디 길 위에서 턱, 버리고 올 수 있는 무엇도 아니지. 개수대에 들어 있는 더러운 그릇처럼 세제로 말끔히 씻어서 그릇장에 다시 진열할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다만 그 시절을 이야기처럼 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한 시절과 이별했어,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소설의 말미에 존 포드의 물음이 나온다. “이젠 당신들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유디트는 그들이 왜 이곳까지 왔으며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할퀴었으며 심지어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이제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헤어지기로 했다는 것도. 이 일이 진짜 일어난 사실이냐고 묻는 존 포드에게 유디트는 말하지,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네. 이제 이야기로만 남아버린 한 시절.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면 우린 깜짝 놀라지, 그런 때가 있었나, 라고. 정말? 이라고 되물으며 그 시절을 돌이키면 그 시절과의 이별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 속을 서성이다가 마치 신발을 들고 조용히 사라져버린 손님처럼 우리 바깥으로 나가버린 거야. 그때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지. 그 시절이 나를 이만큼 살아오게 했고 이만큼 절망하게 했고 그리고 이제 시절로만 남았네, 라고. 한 시절은 삶의 한 퍼즐 조각이 되어 미래에 올 다른 퍼즐을 위해 귀퉁이를 남겨두는 것.
한트케의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책은 아니야. 아주 오랫동안 가방 안에 넣고 다니며 긴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반자야. 그도 길 위에서 다른 책들을 들고 다녔지.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와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 그 가운데 그가 [긴 이별] 편에 인용한 문장을 적어두며 나도 내가 이별을 한 어떤 시절을 조금 더 들여다보아야겠어. 다시 긴 이별이 필요한 생애의 또 다른 순간을 위하여서도. 이별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을 위하여, 건배! 라는 짧은 편지를 남기며.
작품 소개
파격적인 문학관과 독창성으로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숱한 화제를 뿌리는 작가 페터 한트케의 자전적 소설. 전통극 형식에 대항하는 첫 희곡 [관객 모독]을 발표하여 연극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작가는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내는 독창성으로 매 작품마다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작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통해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작가가 종적을 감춘 아내를 찾아 미국 전역을 횡단하는 한 편의 로드무비 같은 이야기를 선보인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우리 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성장소설로 평가받는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매번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내는 작가 페터 한트케는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상, 실러 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프란츠 카프카 상 등 독일의 저명한 문학상을 휩쓸며 오늘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이 책은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라는 점, 주인공의 아내의 직업이 한트케의 첫 아내와 같이 배우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한트케의 삶이 깊이 반영된 자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은 떠난 아내를 찾아 낯선 땅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작품 속에서 그가 경험하게 되는 '이별 여행'은 한 부부가 이별을 위해 걷는 길임과 동시에 작가 자신이 과거의 '나'와 이별하여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작가는 '나'라는 세계에 고립되어 있던 주인공이 점차 '우리'의 가치를 획득해가는 과정을 통해 한 인간의 내적 성장을 그린다.
작가 소개
페터 한트케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텐에서 태어났다. 그라츠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4학년 재학 중에 쓴 첫 소설 [말벌들]로 1966년에 등단했다. 그 해 미국서 개최된 ‘47그룹’ 회합에 참석한 한트케는 당시 서독 문단을 주도했던 47그룹의 ‘참여문학’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서 이목을 끌었다. 한국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실험적인 희곡 [관객 모독]도 같은 해에 출간되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내용보다 서술을 우선하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다수의 혹평과 소수의 호평을 받다가 1970년대 들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통적인 서사를 회복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작품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다. 독일어로 쓰인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이 작품은 1972년에 거장 빔 벤더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1967년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상, 1972년 페터 로제거 문학상, 1973년 실러 상 및 뷔히너상, 1978년 조르주 사둘상, 1979년 카프카상, 1985년 잘츠부르크 문학상 및 프란츠 나블상, 1987년 오스트리아 국가상 및 브레멘 문학상, 1995년 실러 기념상, 2001년 블라우어 살롱상, 2004년 시그리드 운세트상, 2006년 하인리히 하이네상 등 많은 상을 석권했으며, 매해 유력한 노벨상 수상 후보로 지목되는 독일 문단의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 허수경 (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허수경,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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