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구두 한 켤레, 이생진ㅡ 본문
사람들은 일제히
고흐가 그린
헌 구두 앞에서
발을 멈춘다
구두가 긴장한다
누군가가
구두의 대변인인 것처럼
말한다
‘이 구두는 고흐 자신인데
한 짝은 생활고에 시달린
슬픈 얼굴이고
다른 한 짝은
고난을 극복한 후의 얼굴’
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헌 구두가
고흐 같아서 반갑다
그러나
구두는 일체 말이 없다
말은 않지만
많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끝내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구두는 구두다
왜
새 구두를 그리지 않았을까
새 구두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새 구두는
사람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무게를 모른다
새 구두는
상처가 없기 때문에
아직 사람의 아픔을 모른다
결국 찾아낸 것은
구두의 아픔이 아니라
사람의 아픔이다
구두가 서러워한다
ㅡ이생진, 구두 한 켤레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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