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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박형준ㅡ 본문

묘비명, 박형준ㅡ

난자기 2021. 5. 14. 10:07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 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건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ㅡ박형준, 묘비명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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