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기일기
만화가 이상무 본문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불세출의 캐릭터, 독고탁
이상무를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독고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까까머리 독고탁이 그의 작품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도의 일이다. [주근깨]라는 작품이었는데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하고 싶었던 주인공이 변장해서 얼굴을 바꾸어 야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만화계가 큰 변화를 겪으면서 신인작가들이 많이 등장했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대다수의 신인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독고탁’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에는 대본소 체제와 문하생 제도를 통해 한 달에도 수백 권의 만화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 속에서 기성작가가 아닌 신인작가들이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독고탁은 대단히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내 작품을 읽히게 만들어 내 목소리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작품을 보게 만든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보니 나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어요.”
일반적으로 주인공은 얼굴도 잘 생기고 이름도 멋있는 반면, 조연급은 주인공보다 모자란 외모와 특징 없는 이름을 지니게 된다. 그는 이러한 일반성에 반기를 들었다. 독고탁은, 말하자면 역발상의 결과였다. “주인공의 머리를 빡빡 밀어서 개성을 강하게 표현했지요. 이름을 정할 때도 ‘성(姓)을 두 자로 하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글자 성 가운데 가장 센 발음이 나는 것을 택했고, ‘탁’이라는 이름도 동적인 맛을 적절하게 주기 위해 정하게 되었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독고탁은 멋있고 정의로운 모습의 평범하고 건조한 주인공이 아닌 ‘반항심과 질투심을 지닌 말썽쟁이’의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름과 외형 그리고 성격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형성을 깬 독고탁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색함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츰 캐릭터가 지닌 ‘현실적인 인간미’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아가 독고탁이 캐릭터로서 자리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에는 대본소 체제 아래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준 ‘시리즈’ 형태의 작품발표에 있었다.
“작품의 제목을 모두 ‘독고탁의 OOO’라고 지었죠. 이러한 방식이 나오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했던 셈이었어요. 서로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캐릭터를 통해 연속성을 부여하여 ‘이상무’도 알리게 되었죠. 사람들로 하여금 ‘제목이 뭐 이래?’하면서도 한 번 더 시선을 주게 만든 것이죠.” 독고탁이 이상무의 페르소나가 되어 우리 만화를 대표하는 주요 캐릭터로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에는 이처럼 작품 전체를 하나의 큰 틀로 묶는 ‘디자인’적인 측면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모두 울리는' 이상무 만화의 특별한 정서
“최근에 한 지인으로부터 식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어요. 그 분은 내가 만화가라는 사실도 잘 모르는데, 그 따님이 내가 이상무라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에게 식사초대를 부탁한 것이었지요. 알고 봤더니, 그 따님이 학생시절이었던 1970년대에 ‘한국인 시리즈’를 감명 깊게 보았고, 시간이 흘렀어도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성장기에 이상무 작품을 보았던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그의 만화에 얽힌 에피소드를 한, 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설령 ‘한국인 시리즈’를 보고 난 뒤 인생관이 바뀔 정도의 큰 파장은 아니었을지라도, [달려라 꼴찌]를 보고 작품 속에 등장한 ‘더스트 볼’에 대해 과학적 진실을 탐구했다거나 [비둘기 합창]에 등장한 일곱 명의 가족 캐릭터를 실제 자신의 가족 구성원에 대입시켜본 기억이 있다거나 혹은 [포장마차]에 등장하는 애절한 삶의 주인공을 자신의 처지로 감정이입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만화에는 허구 속에서도 현실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과 연결되는 정서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그린 만화는 단순히 웃음을 전달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정서적 감응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형제 혹은 가족 등을 주요소재로 다루다 보니 좀 진부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요. 신파가 짙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와 같은 ‘이상무의 냄새’가 배어있었기에 작품을 보고 난 후 거부감이 아닌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엄희자(1960,70년대 대표적인 여성만화가)는 여자를 울리는데, 이상무는 남자, 여자 모두 울린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주로 감성에 기댄 스토리를 많이 보여주었죠.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다른 성격의 작품을 해봐야지’라고 마음은 먹으면서도 또 비슷한 감정선을 보여주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상무의 이야기는 이상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자신보다 독자들이 먼저 알았다. “내가 직접 스토리를 안 쓰고, 스토리 작가로부터 받아서 한 작품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왠지 낯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의 만화 가운데 스토리 작가와 함께 한 결과물이 드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상무의 이야기, 이상무의 감성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구만화 [달려라 꼴찌] 등 프로야구 출범으로 폭발적 인기 누려
대본소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독고탁’이 잡지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으로부터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어린이잡지가 많이 등장했어요. <소년중앙>에 [우정의 마운드]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1976년도였는데, 그 이후 조금씩 잡지 연재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지요.”

[우정의 마운드]가 인기를 모은 후, [비둘기 합창], [울지 않는 소년],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 10여 년 동안 잡지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만화독자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명작이 된다. 대본소 활동을 통해 중고등학생 팬이 많았던 그에게 잡지는 어린이 독자층까지 확고히 만들어주었다. 더욱이 1980년대 초에는 [태양을 향해 던져라], [다시 찾은 마운드], [내 이름은 독고탁] 등이 극장용 만화영화, [비둘기의 합창]이 TV용 만화영화로 제작되면서 독고탁의 인기몰이를 반영해주었다. 특히, 독고탁이 등장한 [달려라 꼴찌]는 당시 대표적인 야구만화였는데, 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고교야구를 좋아해서 [달려라 꼴찌]도 고등학교 야구를 배경으로 하여 그렸지요. 2여 년 동안 연재를 하다가 완결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출판사로부터 2부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등장인물을 그대로 프로야구로 가져와 진행하게 된 것이죠.”
스포츠 가운데서도 야구를 좋아했던 그의 취향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이 된 셈이다. 하지만, 스포츠만화 속에서도 ‘한국인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이상무의 감성’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가난한 주인공 혹은 고아였던 소년이 야구와 스포츠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은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영웅의 모습이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 같은 감성에는 특히,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 많이 녹아 들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전쟁 직후여서 고아들이 많았고 고아원도 가까운 곳에 여러 곳이 있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가까운 고아원에 자주 놀러 가서 그곳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고아들의 모습들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고아들의 이야기가 작품 속에 사실적으로 표현되자, 한때는 독자들로부터 고아 출신이 아니냐는 오해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현실에 기반을 둔 묘사는 1974년부터 약 3년 동안 발표한 ‘한국인 시리즈’에서부터 특히 두드러졌다.
“재일동포에 대한 이야기로서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두 형제가 등장해요. 형은 귀화해서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보편적인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해서 형에 대해 반감을 지닌 동생 독고탁은 조국이나 동포 등 거시적인 정체성이나 문제의식을 지니고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골방에서 초라하게 죽어가는 아버지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조국이니까 아버지 편을 든 것이었죠. 요컨대, 그에게도 ‘조국’에 대한 실체는 없었던 것이죠. 그에게 조국은 아버지가 골방에서 듣던 레코드판 속의 가요 몇 소절로 기억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이처럼 주인공들의 입장과 감정에 대해 현실적인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인 시리즈’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어질 수 있었다. 동시에 아동만화가 대부분이었던 시대 속에서 청소년과 성인독자까지 만화독자로 불러들일 수 있었던 특별한 작품으로 기록되어진다.
골프만화 전문가로 재탄생하다
최근 들어 그는 골프와 관련된 만화를 자주 발표하고 있다. 평소에도 스포츠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지만 골프와는 무관했던 그가 골프만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대 초, <스포츠조선>이 창간하면서 골프레슨 만화에 대한 청탁이 들어왔어요. 처음엔 나도 극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연재를 하다 보니 자료를 찾아 다니면서까지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것이 5년 동안 지속되었죠.” 얼마 뒤, 어느 공중파 방송에서 그가 발표한 골프만화와 동일한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생겼고, 레슨 하는 장면을 즉석에서 스케치 하는 형식으로 방송에까지 참여하게 되면서 그는 골프에 관한 전문작가가 되기에 이른다. [불타는 그린], [운명의 라스트 홀] 등을 발표했고, 지금도 각종 매체에 골프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최근에 그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페인터 등 다양한 그래픽 프로그램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두 가지 확고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그러니까 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어요. 내 친구들이 등장하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해보려고 하는데, 극적인 재미는 크게 없을지라도 당시에 우리 세대가 성장한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은 것이죠. 다른 하나는 어느 시대에 누가 읽어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읽었을 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 만화를 준비해보려고 해요.” 새로운 작품에 대한 구상을 밝히면서, 그는 세상의 변화에 너무 애써서 적응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더욱 적절한 방식이 아니냐고 말한다. 어쩌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독고탁’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게 되는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이상무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고, 그래서 독고탁이 뛰어 놀던 만화를 기억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감성과 정서를 어린 시절의 그것으로 환원시켜 주는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속의 사냥꾼 / 피테르 브뢰헬 (0) | 2016.02.13 |
---|---|
삶과 죽음의 욕동 /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 (0) | 2016.01.07 |
기억의 지속 / 살바도르 달리 (0) | 2015.12.30 |
메두사 호의 뗏목 / 테오도르 제리코 (0) | 2015.12.29 |
악몽 / 헨리 퓨젤리 (0) | 2015.12.23 |